어린 시절 정리 정돈을 못해 엄마에게 매를 맞은 경험이 있는 엄마는 정리 정돈을 못하는 아이의 행동에서 더 분노한다. 왜 그럴까? 그 아이의 행동에 대한 사실 해석보다 정리 정돈 되지 않은 그 어질러진 책상을 볼 때 자신의 어린 시절 상처와 두려움을 만난다. 엄마의 앙칼진 비난의 목소리, 싸늘한 눈빛, 때로는 등짝에 내리 꽂힌 따가운 손바닥의 맛을 떠올린다. 아주 짧은 순간에 무의식은 그 모든 순간을 현실의 장면으로 끌어온다. 어린 시절 경험한 오감의 느낌들은 적당한 도식과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게으른 나, 정돈 못하는 애는 맞아도 싸다. 정리 안하면 맞는다.’ 이런 스토리는 한 엄마의 무의식 창고에 쌓여 있다가 이 순간 스르르 풀려 나온다.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왜냐하면 화, 두려움은 무의식적으로, 자동적으로 올라오기 때문이다.

분노하며 소리 지르는 무서운 엄마 앞에서 아이는 한없이 쪼그라든다. 이 때 아이는 엄마로부터 쏟아지는 앙칼진 목소리, 싸늘한 눈빛을 청각 시각의 오감으로 무의식에 저장한다. 엄마로부터 전해진 말, 태도, 에너지를 종합해 엄마와 비슷한 스토리를 만들어 낸다. “내가 부족해서 정리 정돈을 못해, 나는 야단맞아도 싸! 창피당해도 싸다 싸! 부족한 나한테 짜증난다. 화난다.” 그 스토리는 무의식에 저장돼 있다가 비슷한 장면이 펼쳐질 때마다 튀어 나온다. 만약 아이라면 과도하게 두려움의 스토리를 만들어 기가 죽을 것이고, 엄마가 된다면 과도하게 두려움의 스토리를 만들어 욱하고 소리 지르게 될 것이다. 가르쳐 주지 않아도 ‘욱 대물림’, ‘ 수치심 대물림’ 등 무의식적 스토리의 대물림이 일어난 것이다.

스토리는 사실이 아니다. 두려움이 만들어낸 각본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 뇌의 전두엽은 스토리와 사실을 구분해 준다. 만약 길을 가다가 긴 막대기를 뱀으로 보고 소리 지를 때는 스토리가 반응한 것이다. 곧 전두엽이 그건 뱀이 아니라 막대기니 겁낼 것 없다고 사실을 알려줄 것이다. 내 상처에서 온 내가 만든 두려운 스토리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전두엽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을 때이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장면을 위험한 상황, 즉 두려움으로 인식하면 전두엽은 멈춰버리고 편도체가 모든 것을 장악한다. 더 이상 두려움을 불러오지 않으려면 자신의 상처, 두려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걸 인식하면 분노 대신 멈출 여유를 찾을 수 있고, 나아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인지심리학자인 크리스토퍼 차브리스와 대니얼 사이먼스는 ‘선택적 주의’ 실험을 한다. 사람들을 흰 셔츠, 검은 셔츠 두 그룹으로 나눠 농구공을 패스하게 한 후 흰 셔츠 그룹의 패스 횟수가 몇 번인지 세 보라는 것이다. 이 실험의 핵심은 중간에 9초 정도 나오는 고릴라를 보느냐다. 실제 고릴라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 반이 넘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뇌의 심리적 맹시(Inattentional blindness) 때문이다. 이는 사람들이 특정 부분에 주의를 집중할 때는 다른 것을 보지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본다고 믿지만, 사실은 집중하고자 하는 것, 또는 보고 싶은 것들, 중요하다 생각한 것들만 본다. 눈앞에 고릴라가 나타나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우리 뇌의 메커니즘이다. 우리 뇌는 주인이 집중하는 곳에 반응한다.

주인이 깨어 있으면 주인의 선택에 따라간다. 뇌를 두려움이 아닌 원하는 것에 집중하게 할 수 있을까? 실수, 실패에 대해 미덕을 깨울 수 있는 순간으로 보면 가능하다. 정리 정돈을 못하는 아이를 볼 때 분노하는 대신 아이 미덕을 깨울 수 있는 기회로 보고 미덕을 불러주는 것이다.

“지금 어떤 미덕을 깨우면 좋을까?” “네 정돈 미덕이 자고 있어서 그래.” “어떻게 정돈 미덕을 깨울 수 있을까?” 이렇게 말하는 순간 ‘분노 대물림’, ‘수치심 대물림’이 멈춘다.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높은 자존감 대물림’ ‘미덕 대물림’의 길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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