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서울로 대표되는 도시 아이들이 얼마나 자연에 무지한가를 알려주는 말로 ‘쌀나무’라는 말이 있었다. 쌀이 달리는 나무, 즉 벼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얼마나 얼토당토한 말이냐 웃을 수 있겠지만 당시에는 정말로 그렇게 아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만큼 도시 아이들에게 자연이 멀어졌던 때가 있었다. 다행히도 이제는 벼에서 쌀이 나온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대학시절 서울 강남이 고향인 친구가 있었는데 이 친구는 정말로 어렸을 때 쌀나무를 철썩 같이 믿고 자랐다 한다. 그런 친구와 농사일을 돕고 농촌에 대해 고민해보는 농촌활동, 즉 농활을 함께 가게 됐는데 고추밭을 본 친구는 나에게 흥분한 듯 이야기했다. 
“세상에! 이 동네 정말 대단해. 유전공학이잖아. 한 나무에서 빨간 고추와 파란 고추가 같이 달려. 신기해” 

기가 막혔다. 초록색 고추가 익어 빨갛게 변하는 것을 몰랐던 친구 덕분에 한바탕 웃을 수 있는 추억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정말 이 나무의 이름을 들은 사람은 깜짝 놀란다. ‘고추가 나무에 달려?’하며. 쌀나무는 없지만 숲에 가면 고추나무는 있다. 봄에 노란 꽃을 보는 생강나무가 우리가 먹는 알싸한 생강이 달리는 나무가 아니듯이 고추나무도 매콤한 고추가 달리는 나무가 아니다. 단지 나뭇잎이 고춧잎과 닮았다는 이유로 고추나무라 불려졌다. 그런데 사실 고추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건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인데 고추나무는 이미 그 전부터 한반도 숲에 자리 잡은 나무였다. 그 전에는 무엇이라 불렸을까? 고추나무가 너무 유명해 예전 이름을 잃어버린 경우다. 

같은 이름을 가진 고추와 고추나무에 대해 비교해보자. 고추는 우리나라에선 겨울을 나지 못해 일년생 풀로 키우지만 고추의 원산지인 남아메리카에서는 여러해살이 풀이다. 반면 고추나무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과 일본 등지의 숲속 계곡 양지바른 곳에 주로 자라는 낙엽 지는 작은키나무다.

고춧잎과 비슷한 고추나무 잎은 줄기에 3장씩 모여 달리는데 그 하나하나의 잎이 고추의 잎과 닮았다 해서 고추나무란 이름의 근거가 됐다. 대신 고추나무 잎은 가장자리에 잔 톱니가 있는데 비해 고추의 잎은 매끈하다. 고추의 어린 잎을 고추나물이라 해서 무쳐먹는데 고추나무 잎도 나물로 먹는다. 고추나물은 고추 특유의 쌉싸름한 맛과 향이 살짝 배어있는가 하면 고추나무 잎은 데쳐 조물조물 무쳐먹으면 고소하다. 튀김으로도 먹고 묵나물로도 먹는다. 

꽃은 서로 비슷한 시기 5~6월에 하얀 꽃으로 피기 시작하는데 고추는 가을까지 피고지고를 반복하며 열매를 맺는가하면 고추나무는 그 시기에 집중적으로 피어 눈이 온 듯 하얗게 뒤덮는다. 그 꽃을 먹기도 한다. 꽃이 피기 전 봉오리일 때 먹으면 터지는 맛이 일품이다. 아까시보다 단 맛이 강하며 향긋하다. 꽃비빔밥에 넣으면 좋다. 

꽃이 지고 열매가 달리기 시작하는데 전혀 다른 모습이다. 굳이 고추의 모습은 설명하지 않겠다. 고추나무 열매는 어찌 보면 튤립 꽃봉오리를 거꾸로 매달아놓은 것 같기도 하고, 가운데 가르마를 해서 넘긴 소녀의 머리모양 같기도 하다. 납작한 모양으로 가운데를 중심으로 두 쪽으로 방이 나뉘는데 여기에 한두 개의 동그란 열매가 들어있다. 처음엔 연두색으로 열리다가 노랗게 익어가며 나중엔 갈색으로 마른다. 겨울에도 달려있다. 

꽃과 열매가 충분히 아름다워 곁에 두었을만한 나무였음에도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게 신기하다. 올 여름 계곡을 찾게 되면 앙증맞은 열매를 찾아보자. 그리고 반갑게 인사를 해주자. 고추가 달리지 않아도 좋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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