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말고사를 마치고 학생들과 중국 여행을 다녀왔다. 중국 유학생과 한국 학생이 한 팀을 꾸려 6박 7일 간 중국 대표 도시인 북경과 상해의 생활상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여행이었다. 한국과 중국을 비교해서 우열을 판단하기보다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을 관찰하고, 왜 그럴까 생각하는 것이 여행의 주된 목적이었다. 출발에 앞서 한국 학생들에게는 북경과 상해가 중국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아직 지식과 경험이 부족한 청년 시절엔 낯선 것을 보면, 일부만을 보았음에도 그것이 전부라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필자에게 중국은 친숙한 나라였었다. 2007년 약 6개월간 북경에 머물며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사회를 관찰했다. 1년의 연구년 중 절반은 미국에서 보내고 나머지 절반은 북경에서 보냈다.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모르고서는 결코 한국사회에서 교육자나 지식인으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미 2001년부터 중국 전역을 여행하며 책에서는 얻기 힘든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체감해 왔었다.

10년 만에 다시 찾은 북경은 정말 크게 달라져 있었다. 마치 성형수술을 받아 딴 사람으로 변한 졸업생을 만난 것 같았다. 전에 알던 그 제자가 맞긴 한데 뭔가 낮선 느낌이 드는 것처럼, 북경은 익숙함과 낯설음으로 동시에 맞아주었다. 필자가 6개월간 머물던 당시의 북경은 2008년 올림픽 준비로 분주했었다. 도시 전체가 공사장이었고, 성공적으로 올림픽을 치르자는 구호가 적힌 빨간 현수막과 벽보가 거리를 장식했다. 당시 중국인들은 마치 시어머니의 첫 방문을 준비하는 며느리처럼 보였다. 성의를 다해 열심히 준비하고 있지만 불안하고 자신 없는 모습이었다.

땅 덩어리 큰 나라의 수도라서 거대 건물들은 많았지만, 도시 북경의 모습은 허름하게 차려입은 덩치 큰 사람들이 어깨가 처진 채 무표정하게 모여 있는 것 같았다. 그 사이를 헤집고 돌아다니는 낡은 자동차의 매연과 경적소리는 산뜻하고 세련된 올림픽이라는 단어와는 결합할 수 없어 보였다. ‘북경’과 ‘올림픽’은 농촌의 늙은 지주와 어린 소작농 처녀를 억지로 엮으려다 비극으로 끝나는 중국 신파소설의 제목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성공적으로 올림픽을 치렀고, 필자가 10년 만에 다시 찾은 중국의 모습은 올림픽의 효과인지 그야말로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공항과 북경 시내를 이어주는 고속전철 안에서 본 북경 외곽은 고층아파트 단지의 연속이었다. 예전에는 북경 시내에서나 볼 수 있었던 현대식 건물들이 묘목재배단지나 과수원 자리에 들어선 것이다. 상전벽해(桑田碧海)가 아닌 상전벽고층아파트였다.

다음날 찾아간 중국인들의 성지 천안문 광장과 그 주변 관광지도 크게 달라져 있었다. 외국인 관광객과 배낭족이 모이던 첸먼 주변의 상가나, 전통 주거지인 후통은 거의 모두 재개발 돼 사라졌다. 대신 건물은 중국식, 거리는 서양식인 관광상가들이 그 자리에 들어섰다. 천안문을 찾는 사람이면 빠지지 않고 들르는 서민시장 왕푸징 거리는 음식 골목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고급 명품 거리로 변했다. 북경은 세계 어느 나라 대도시와 견줘도 손색없는 세련된 도시로 거듭나 있었다.

그러나 전혀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바로 공산당의 감시와 통제였다. CNN이나 BBC처럼 중국 공산당에 대해 비판적 보도를 하는 외국 뉴스채널은 여전히 TV 채널목록에서 찾을 수 없었다. 뉴욕 타임스와 구글은 인터넷 접속이 되지 않았다. 어제 스촨성에서 120명이 사망하는 대형 산사태가 발생했지만, 한국의 KBS 격인 CCTV 저녁 뉴스의 첫 번째 기사는 시진핑 주석의 지방 일정이었고, 두 번째는 리커창 총리에 관한 것이었다.

거리의 통제와 감시는 오히려 강도가 높아졌다. 천안문 광장은 예전과 다름없이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중국인들로 가득했지만, 그런 관광객 주위를 나방처럼 맴돌던 수많은 잡상인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천안문 광장에 들어가려면 경찰 검문과 금속탐지기를 통과해야하기 때문이다. 지하철을 탈 때도 마찬가지였다. 버스 안에 카드단 말기가 설치되고 요금을 받던 안내원들은 사라졌지만, 검은 제복에 빨간 완장을 찬 안전관리원이 그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예전과 다름없는 북경의 또 다른 면모는 보행자와 자전거와 자동차가 마구 뒤섞이는 교차로 풍경이었다. 과거 북경 시내에서 교차로를 건너려면 신호등이나 횡단보도 표시보다 눈치와 직감을 사용해야 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건 몰라도 교차로 보행자 신호등만큼은 잘 지키는 한국인들이기에, 중국의 교차로는 중국인들의 문화적 후진성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간주돼 왔다.

북경을 처음 방문한 한국 학생들은 매우 당황스러운 기색이었다. 치안이 엄격한 사회주의 국가에서 왜 교차로 불법행위를 방치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며 한 학생이 고개를 저었다. 교통법규 위반이 공산당 집권을 위협할 정도가 되면 그때는 중국 정부가 강력히 단속할 것이라고 필자가 준비한 모범답안을 말해 줬다. 비록 겉은 많이 달라졌지만 속은 크게 변한 게 없는 중국의 모습을 10년 만에 다시 찾은 북경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저작권자 © 용인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