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호 박사

강의 주제 : 우리 시대의 민주시민 교육 왜 필요한가?

사회학자 김찬호 교수

경기도박물관에 처음 와 본다. 여러분들을 보니 서로 만나고 싶어하는 간절함이 느껴진다. 연대감 같다. 이번 아카데미 강좌의 큰 주제가 민주시민교육, 생활 속 민주주의로 알고 있다. 민주‧시민‧교육‧생활 속 민주주의…그 단어 하나하나를 낱개로 보면 만만치 않은 개념들이다. 우선 한국에서 교육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짚어보자.

여러분은 학교에서 민주주의를 배워 본 경험이 있나? 민주주의 사회에서 집단적 의사표현의 방식으로 인정되는 것이 데모(시위)인데, 언제 처음 해봤나. 개인적 경험을 말하자면 나는 1977년경이다. 관제 반미 데모였다.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당시 ‘청와대 도청사건’이 있었다. 미국은 카터대통령 시절이었는데, 미국정보기관이 청와대를 도청을 했다는 사실이 폭로되어 박정희 대통령이 발끈했고 전국의 학교들이 나섰다. 고2 때였는데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그 과정에서 사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스크럼 짜고 나가다가 언덕에서 넘어져 학생이 다쳤다. 당시 문교부(교육부) 지시로 나선 데모였지만 아무도 책임지는 이가 없었다. 그 시절에 합창부 활동도 해봤다. 여의도에서 펼쳐진 국군의날 축하 행사에 동원된 것이었는데 4개 학교가 한 파트씩 맡아 합창을 했으니 대규모였다.

 ‘동원의 시대’에 대한 나의 개인적 기억이자 트라우마이다.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보자면 동원의 그 시대는 분명 민주주의의 반대 개념이 아니었을까싶다. 6·25 전쟁 당시 미군들이 포로를 심문할 때 가장 어려웠던 통역이 ‘의용군으로 끌려와서’였단다. 우리는 익숙하게 들은 말이지만 의용군을 뜻하는 ‘발런티어(volunteer)’라는 말이 자발적 지원을 내포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끌려왔다’ 것과는 모순 관계에 있는 것 아닌가. 마치 자율학습을 강제로 했다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동원의 시대’에는 이런 일들이 흔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민중의 통치’로서의 민주주의
민주주의를 영어로 표현할 때 일반적으로 데모크라시(democracy)로 쓴다. 크라시(cracy)는 통치권이다. 민주주의는 ‘민중의 통치(rule by the people)’라는 개념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한자 개념어의 대부분은 일본에 의해 만들어져 우리사회에 이식됐다. 민주주의라는 개념어도 마찬가지다. 일본에선 왜 민주주의라고 했을까. ‘민중의 통치’라고 하면 살벌하니깐 그랬다. 일본도 오랜 세월 우리와 비슷한  파시즘의 시대가 있었기 때문에 순화한 것으로 생각된다. 

‘민주주의’라 말하면 자유, 주권, 평등, 다수결, 선거, 법치, 인권 등을 떠올린다.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개념어들이다. 그 반대편에는 무엇이 있을까. 독재, 왕정 등이 있을 것이다.

먼저 독재의 역사를 짚어보자. 아직도 민주주의 반대 개념으로 왕정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은데 북한의 김일성 수령론이나 우상화도 천왕제의 잔재라고 보는 경향으로 이해된다. 북한은 사실상 민주주의 경험이 한 번도 없었다. 일제 식민지배에서 곧바로 사회주의로 넘어갔으니 말이다. 만일 민주주의 경험을 했다면 지금의 왕정국가에 가까운 세습체제를 순응적으로 받아들이긴 어려웠을 것이다.

일본에서조차도 민주주의가 활성화됐던 시기는 1945년 패전 이후다. 그 당시 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현재 일본 내에서 가장 리버럴한(자유주의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 패전 이후 군정시기 동안 그 세대가 미국식 민주주의 교육을 제대로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교과서에서 민주주의 핵심어는 존중, 존엄 등으로 규정했다.

민주주의가 온전히 실현되려면 생활 속 민주주의, 다양성, 참여, 연대, 공공성, 다양성 등의 개념이 민주주의 개념 안에 들어와야 한다. 중요한 것은 독재만 무너지면 당연히 민주주의가 오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어쩌면 큰 권력에 맞서 무너뜨리는 것이 쉬울 수도 있다. 반면 가까운 곳, 익숙한 곳에서 미시적 가치를 지키는 것은 더 어려울 수 있다. 생활 속 민주주의는 그만큼 쉽지 않은 것이다. 명절 때를 생각해 보라.

점점 갈수록 젊은 사람들조차도 ‘꼰대질’ 하는 걸 종종 보게 된다. 학교에서도 가끔 우리를 놀라게 한다. 신입생 환영회 등을 빌려 군기잡고,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 결국 우리 안에는 권력을 휘두르고 싶은 에고(Ego·자아)가 존재한다. 이것을 직시하지 않으면 공허할 수 있다. 국가의 민주주의는 보인다. 지금 대통령이 자기 옷 자기가 벗어거는 등 별것 아닌 작은 변화인데 엄청난 감동을 준다. 그러나 생활 속 민주주의는 가려져 있고 분절화 돼 있다. 이대 최순실 학사비리 사건 같은 게 얼마나 많겠는가. 최근 국정농단 사건처럼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드러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광장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요즘 화두는 광장이다. 광장은 민주주의라는 막연한 개념보단 훨씬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한국에서 광장의 역사는 어떻게 될까. 서양에선 매우 미시적 분석이 많다. 광장의 역사, 공간의 역사, 심지어는 침실의 역사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광장의 역사는 ‘동학’에서 시작됐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이전 시대로 올라갈 수도 있지만, 동학 정도면 확실히 동의할 수 있는 광장이라 말할 수 있다.

광장에 모였던 최근의 역사를 보면 80년의 광주민주항쟁,  87년 6월 항쟁, 2002년의 월드컵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2016년과 2017년에 걸친 광화문 광장이 있다. 그런데 광화문 광장은 특색이 있다. 국가권력이 너무 부조리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나선 광장이 80년대라면 2002년 월드컵 때의 광장은 전혀 달랐다. 그 과정 자체가 환희였다.

이번 촛불 광장은 뭘까. 80년대 광장과 2002년 월드컵 광장이 합쳐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계가 깜짝 놀란 2002년과 2017년의 광장은 수백만 명이 모였는데 사고도 없었다. 우주의 기운같은 것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일동 웃음)

국민이 하나 된 마음으로 거대한 축제를 연 것이었으며 축제 속에서 강한 희열을 느꼈다. 재미도 있었다. 바로 그 속에서 ‘공적 행복감’을 느꼈던 것이다. 우리는 흔히 행복을 얘기할 때  돈을 많이 벌거나 쓸 때 느낀다는 이미지가 있다. 광장에서의 희열은 그 차원이 다른 것이다. 너도나도 그 무엇을 함께 만들어 가는 것, 그 속에서 비교되지 않는다는 것, 나 자신만의 존재감은 드러나지 않지만 생각지 못한 엄청 난 것을 만들어간다는 경이로움을 체험한다.

왜 월드컵을 집에서 TV를 보면 되지, 수백만이 모이는 광장에 나와서 보나. 광장에 나와 보면  ‘당신도 기쁘군요? 저도 기뻐요’ 이처럼 공감한다. 함께 바라보는 열망, 함께 꿈꾸는 세상, 이런 것들이 단단해지는 것이다.  그것이 공적 행복감이다. 때문에 우리가 행복해지려면 일상 속에서 작은 광장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이 서로 만나고 싶어하는 간절함이 느껴지는 것도 ‘공적 행복감’을 열망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시민혁명으로 얻은 자유, 신자유주위로 국가 지배
정치적 민주주의를 이루면 사람들은 행복해질까. 이 중요한 문제를 화두로 생각해 보자. 역사적으로 볼 때 영국과 프랑스 등의 시민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다. 부르주아 어원은 성(城)을 프랑스말로 부르(Bourg)라고 하고 ‘성 안에 사는 사람’을 부르주아(Bourgeois)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한다. 이들은 봉건 영주와 같은 왕정, 귀족 같은 특권층과 구별되어 자유를 원하며 기득권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우리는 부르주아와 귀족을 혼동하곤 하는데 그들은 상호 대립적이며 사실 우리에겐 부르주아가 없었다. 봉건영주들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자유도시는 예나 지금이나 상인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다. 상인이 원하는 것은 경계를 없애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 시장을 원하는 부르주아 속에서 시민이 형성된 것으로 봐야한다. 

근대에 가장 앞서갔던 영국조차도 여성들의 참정권이 생긴 것은 20세기 들어서이다. 놀라운 일이다. 그마저도 엄청난 싸움의 결과다. 한국에서 여성들 참정권이 생긴 것은 해방 후다. 큰 차이가 없다. 사실상 거저먹은 것이다. 서양이 열심히 싸워 얻은 사회적 시스템이 들어온 것인데, 문제는 투쟁과 시행착오 등을 거치지 않고 압축적으로 이식되다보니 치열한 문제의식이 없고 스토리가 없으며 따라서 지켜내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행스럽게 우리는 1987년 항쟁을 통해 민주주의를 되찾았지만 그 이후 국가를 지배한 것은 시민이 아니라 시장(市場)이었다. 다시 말해 자본이 국가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신분은 자유로워지고 형식적 민주적 체제는 얻었지만 그 틈으로 신자유주의가 들어오면서 정치권력을 대신한 돈이 지배하는 사회, 돈만 있으면 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치며 진보적 가치는 강조됐지만 경제적 불평등은 해소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결국 우리 과제는 경제민주화로까지 나아가야 진전된 민주시민사회로 가는 것이다.

일상 속에서 광장을 만들어야 한다
생각해보면 많이 자유로워진 것 같은데 이상해졌다. 자유로운 자본에 의해 고용도 자유로워졌다. 누가 제재하겠나. 국가? 국가가 시장을 통제하는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상태다. 그러니 고용시장은 자본이 원하는 대로 비정규직이 늘고 있다. 본래 비정규직은 월급을 많이 줘야 하는 게 맞다. 왜? 꼭 필요할 때만 쓰니깐. 그런데 월급 적게 주려고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게 우리 사회다. 다시 한 번 민주시민교육을 생각해 보자. 우린 왜 광장에서 흥분했나. 왜 나갔나. 의무감과 분노와 당위? 분노와 당위성 때문에? 그건 아닌 것 같다. 

시장은 가격을 만들고 국가는 규격을 만든다. 광장에서는 그에 얽매이지 않는 인격을 만든다. 공간이 사람을 바꾼 것이다. 사회적 분위기, 기풍이 사람을 행동하게 만든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 속에서의 나는 대체 불가능한 그 무엇으로 인정받는 것이 중요하다. 대체가능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불안이 늘 나를 지배한다. 더구나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때는 더 많은 직업과 일자리가 로봇 등에 넘겨줘야 할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귀한가. 느낌을 공유하면서 유대를 쌓고 함께 바라보는 열망, 서로를 단단히 묶어주는 일상 속에서의 광장을 만들어야 한다. 민주주의도 집에서는 어렵다. 밀실의 한계다. 공적 영역에서 보는 가족은 달라 보인다. 공적 행복감을 공유하면 가족 존중의 마음이 생긴다.

그리스 시대에 프라이빗(private, 사적인) 인간은 ‘바보’란 뜻이었다. 당시 광장을 통해 민주주의에 참여하는 것은 특권이자 권리였으며 일상이었다. 광장에서 서로 의미있는 타자(他者)가 되어 줌으로써 전혀 다른 나를 발견하게 된다. 가정이란 울타리를 벗어나면 공공의 영역에서 좋은 의미의 긴장감이 생기고 탁월함을 내보일 기회가 생긴다.

마을 축제에서 보면 한심하단 소릴 듣는 아이가 이웃집 아줌마에겐 칭찬을 받는다. 집에서 별 볼일 없는 아빠처럼 보여도 공적 영역과 광장에서 만나는 아빠는 다르게 보인다. 공적 행복감을 함께 하면 가족 간에도 존중하는 마음 생긴다.

지금 용인을 비롯한 여러 지자체에서 추진 중인 민주시민 교육과 관련해 말해보자. 이것이 제도화되고 있지만 확산과 공감을 얻자면 넘어야할 벽이 많다. 먼저 프레임을 전략적으로 ‘민주시민교육’이라 붙이지 말고 의식하지 않고 모였으면 좋겠다. 선입견, 선경험 같은 것들이 있게 마련이다. 완벽하지 않으면 어떤가. 왜 우리는 어느 정도 레벨이 돼서야 무대에 서야 하나.  쉽게 펼쳐 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공유할 수 있고,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민주주의의 공적 공간, 즉 여러 층위의 광장을 만드는 것이 좋겠다. 민낯으로 다가갈 수 있는 공간에서 전혀 관계없는 것들이 만나면 새로운 혁신이 가능하며, 연결하면 의외의 것들이 생겨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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