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대장군(1546~1592) 사당과 신도비 처인구 남사면 완장리 중동마을에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관찰자를 제수받고 왕을 의주로 호종하는 한편, 서울 탈환을 위해 남하하다가 전사했다. 묘는 1972년 경기도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되었으며, 1975년 낡은 사당을 해체, 복원하고 신도비를 건립했다.

청송 심씨의 시원-고려조 심홍부
고문헌에 전하는 심씨 본관은 <조선씨족 통보>에 63본, <증보문헌비고>에 70본으로 나타나 있지만 이는 지파의 거주지 중심 이야기로 보인다. 현재 알려진 심씨 본관은 청송, 부유(순천), 삼척, 풍산, 의령, 전주 등 6본이며 이들 중 대표적인 심씨는 청송(靑松) 심씨(沈氏)이다.

본관 청송은 경상북도 동부와 중부에 위치한 군의 지명이며, 청송 심씨 1세조는 고려에서 위위시승(衛尉侍丞: 궁중관계 의식용의 물건을 담당하던 종6품 벼슬)을 역임한 심홍부(沈洪孚)이다. 선계는 알려지지 않았다. 2세 연(淵)은 합문지후를 역임하였고 3세 용(龍)은 전리전랑을 역임하면서 권문세족의 발판을 마련했다.

3세 용의 큰아들 덕부(德符 1328~1401)의 호는 허강(虛江)이며 시호는 정안(定安)이다. 공의 성격은 너그러우며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고려 말엽에 군산일원에 300여척의 왜구가 출몰하자 삼도도원수에 임명돼, 부원수 최무선과 함께 왜구를 섬멸했다.

이때 최무선이 만든 화약을 사용했으며 이것이 우리나라 전투에 화약을 사용한 시초로 알려져 있다. 이후 1386년 명나라에 다녀온 후 ‘청성(현 청송의 옛 지명) 부원군’에 봉해졌다.

공은 1388년 우군 통제사 이성계를 따라 요동정벌에 출정, 위화도 회군 후 조선개국에 협조해 청성백에 봉해졌다. 4세 정안공이 청성부원군에 이어 청성백에 봉해짐으로서 후손들은 청송을 본관지로 계대를 이어오고 있다.

한편 동생 원부(元符, 생몰미상)의 호는 악은(岳隱)으로 ‘고려 5은’ 중의 한 사람이다.  고려충신 오은(五隱)이라 함은 포은(圃隱) 정몽주, 대은(大隱) 변안열, 율은(栗隱) 김저, 목은(牧隱) 이색, 야은(冶隱) 길재)을 가리키는 것으로 원부 공은 고려에서 여러 벼슬을 하다가 조선이 개국되자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를 지킨 고려의 충신이다.

이로서 형은 조선 개국에 협조하여 높은 관직에 오르고 아우는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를 지키어 고려에 충성하니 형제는 전혀 다를 길을 걷게 되었다. 이에 원부의 후손들은 선조의 유훈을 받들어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청송 인근에 세거지를 이뤄 살아왔으며 이들을 향파(鄕派)라하고 수도 인근에 거주하는 덕부에 후손들을 경파(京派)라 한다. 현재 2개 파에서 여러 지파로 분리되면서 계대를 이어오고 있다.

심덕부, 심온, 심회 3대 정승…명문 거족 발돋음
청송백의 칭호를 받은 정안공 덕부는 아들 7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현달하였으며 이들 중 종(淙)은 태조의 부마, 징(澄)은 인수부 부윤, 온(溫)은 태종의 국구(국구: 장인 ), 인봉은  도총제를 역임하였다.

정안공으로부터 관직에 진출하기 시작한 청송 심씨 가문은 조선조에서 왕비 3명, 상신 13명, 문형 2명, 청백리 2명, 호당 2명, 공신 8명, 장신 1명, 문과급제자 194명을 배출했다. 타 가문에 비교하면 왕비 3인은 청주한씨 5명, 파평 윤씨, 여흥 민씨 각 4명으로 왕비 배출가문 네 번째에 해당한다.

특히 심덕부, 심온, 심회 3대가 정승에 올라 역사상 3대 정승을 낸 집안은 달성 서씨, 청풍 김씨 세 집안뿐으로 청송 심문이 조선조에 명문거족으로 자리매김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중기에 사림이 동서분당으로 갈라질 때 훈구파에 속한 인물이면서 사림을 보호하며 서인의 영수가 된 심의겸, 조선 말엽 임오군란 때 장호원에 피신한 명성황후에 밀지를 전한 심순택,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비분강개하여 의병을 일으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심수택, 일제강점기에 <상록수>의 저자 심훈 등이 청송심문으로 가문을 빛냈다.

용인의 명가 청송 심문

심시정의 자는 이숙 호는 현재이며 겸재 정선과 더불어 18세기 대표적인 문인화가이다. 부사를 지낸 그의 아버지 심정주와 함께 처인구 이동면 서리에 묘가 있다.

용인에 잠든 청송 심씨로 잘 알려진 인물은 세종의 장인이며 영의정을 지낸 심온이다. 애초 묘소가 용인군 수지면 이의리에 있었는데, 현재 이의리는 수원으로 편입돼  수원시 이의동으로 불리고 있다. 

처인구 남사면 완장리에는 심대장군 묘소가 있다. 이동면 서리에는 심사정의 묘소가 전한다. 그리고 유명인으로 백암면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서양화가 심형구, 이동면 어비리에서 태어난 심창유가 문교부장관을 역임한 바 있고 이동면 화산리에서 태어나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심관섭이 있다. 그리고 심온의 조카인 심석준의 묘가 포곡읍 가실리에 있다.

심씨들은 묘소 인근에 동족촌을 이루고 살아왔으나 현재는 산업화로 동족촌이 해체된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인구 포곡읍, 유림동의 이진말, 처인구 남사면 완장리, 처인구 이동면 어비리, 처인구 백암면, 장평리 옥산리 일원에 동족촌을 형성해 유지해 오고 있다.

포곡읍 가실리 심씨 문중들은 한국전쟁 당시 가옥이 소실돼 흩어졌고 1970년대 자연농원(현 에버랜드)이 들어서면서 가실리 많은 땅들이 자연농원 흡수되었다고 한다. 현 호암미술관 뒤편 한 골짜기 역시 청송 심씨 땅이었는데 자연농원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를 매입하려 하였으나 명망있는 심씨 가문은 이를 팔지 않아 이 땅을 외롭게 지키고 있으며 현재는 청송 심씨 독가촌을 이루고 있다.

바로 이곳 가실리에 영의정 심온의 조카이며 심징의 아들 심석준의 묘가 있다. 심석준(沈石儁, 생몰 미상 시호 양혜)은 태종이 외척을 축출할 때 삼촌 심온과 함께 삭탈관직 당한 인물로, 호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추증됐다. 시호는 국가에 공을 세우거나 훌륭한 업적을 남긴 신하에게 임금이 내리는 것인데 음보로 관계에 진출하여 시호를 받은 경우는 드믄 현실이나 양헤공이 시호를 받았다함은 특이하다 할 수 있다.

백암면 용천리 일원 역시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데 언제부터 이곳에 정착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이곳 출신으로 사회에 공헌 한 이로 1882년 용천리에서 출생한 심종협(沈鍾協)이 강점기에 광주군수, 외사면(현 백암면)장을 역임하였으며 그의 큰 아들 심원구는 미 군정시 서울 재동초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둘째 아들 심형구는 일본 동경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이화여자대학교 미술 대학장을 역임하였다. 그의 부인이 오페라 가수로 유명했던 김자경이다. 또 종협의 손자 심태식은 노동법 연구학자로 유명하며 경희대학 총장을 역임한 바 있다. 외사고등공민학교(현 백암고등학교 전신)을 졸업하고 김대중 대통령 시절 환경부 차관을 역임한 심영섭이 있다.

각계 각층에 후손들 포진
구한말 암울한 시기인 1907년 백암면 장평리에서 배워야 산다는 기치아래 근대교육기관인 봉양학교를 설립 교육하다 일제의 압박으로 폐교돼 시름하다 기독교에 귀의해  율리교회를 개척한 심원용이 있다.

고림동 이진말에 조선 후기 화가로 유명한 심사정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현재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은 조선 후기의 화가 겸재 정선, 관아재 조영석과 더불에 ‘3재’라 일컬어지는 인물로 정선의 문인이다.

경북 청송에 있는 청송 심씨 시조 심홍부 묘

그의 작품으로 잘 알려진 것은 강상야박도, 따따구리, 파초와 잠자리 등이다. 한국전쟁전만 해도 고림동 심씨 집에 현재 심사정의 그림이 여러 점 있었으나 전쟁 중 화재로 인해 소실된 것으로 전해진다. 공의 묘소는 파주에 있던 것을 1981년 이동면 서리로 이장했다. 이진말에서 태어난 심영구는 고림동에 실업학교인 용인상업고등학교를 설립, 이 고장 실업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처인구 남사면 완장리에 충장공 심대 묘소가 있고 그 일원에 심문들이 동족촌을 이뤘으나 현재는 3집만이 남아 선조의 유훈을 기리고 있다. 심대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어가를 호종(扈從:임금을 따라 보호 함)하여 호종공신으로 책록됐고 경기관찰사로서 서울 탈환 작전을 진두지휘하다 전사한 분이다.

1610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장이다. 그의 묘소는 지방기념물 3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으며 그의 유품으로 경기도, 충청도  지도, 교지, 완문, 다수가 종손 집에 보관되어 오다가 현재는 경기도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특히 청원군심대호종공신교서는 1175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수지에서 수원으로 가다보면 정암 조광조의 묘소를 지나 오른편에 거대한 한옥이 보인다. 이 한옥은 세종의 장인이며 영의정을 지낸 심온의 사당이다. 심온의 묘소 앞 묘표석은 안평대군의 글씨로 전해지고 있다.

심온 묘소 인근에 경기관찰사를 역임하였던 심연, 의주 부윤, 전라감사를 역임했던 심택, 기근이 들자 자신의 재산을 털어 기민을 구제하였던 심득원 묘가 있다. 그리고 신봉동에 소설 ‘상록수’의 작가로 유명한 심훈의 묘가 있었는데 수지가 개발되면서 다른 곳으로 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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