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석 교수(강남대)는 정필영 선생(1929~2010)의 장자인 익화씨 댁에서 촬영한 사진자료를 본사에 처음 공개했다. 정필영 선생은 용인의 대표적인 교육자이다. 용인향토문화연구회, 성산신문사 편집위원, 용인향토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정필영 선생의 소장 자료에는 광서(光緖) 8년(1882)부터 13년(1887) 간에 정일채(鄭一采), 정찬홍(鄭纘弘) 등과 부인에게 내린 교지 22건이 있으며, 정국영(鄭國永)이 경성우편국과 광혜원 우편국에 근무하던 당시의 우편통과 보험관련 연수수료증이 들어 있다. 이 자료는 대한제국시대의 우편 업무를 살필 수 있는 증빙자료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특히 우편국의 사업 확대로 보험 관련 직무 연수를 실시한 증빙자료가 주목을 끈다.  

정필영 선생이 소장하던 자료 가운데 교육관련 자료가 특히 많은데, 선생이 평생 교육자로서 후학 양성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교육관계 자료 가운데는 1908년부터 1910년까지 대한제국시대의 교육 실태를 살필 수 있는 교재와 기호학교(畿湖學校) 제1회 졸업식 사진(1910년) 등이 주목된다. 확인된 교재에는「간이체조」「대한신지지」「도의한국지」「물리교과서」「박물학」「산술신서」「산식」「잠업」「조선어독본」「신편소학교수법」등 교재 11책이 현존하고 있다.

참고로 기호학교(畿湖學校)는 1908년 기호학회(畿湖學會)에 의해 창립된 사립학교로, 중앙고등학교의 전신이다. 설립 취지는 지방의 교육이 교사빈곤으로 인해 발전이 미약했으므로 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했다. 학과는 수신·교육·학교관리법·지문(地文)·지지(地誌)·역사·물리·화학·박물·산술·어학·경제·법학·농학·도화·음악·체조로서 본과와 특별교과를 설치했다. 본과의 수업연한은 3년, 특별과는 1년이다. 학교의 위치는 당시 서울의 소격동(昭格洞)으로, 처음 모집인원은 연령 20세 이상자 95명이었다. 교장은 박승봉(朴勝鳳)이었다. 그 후 유길준(兪吉濬)이 설립한 융희학교와 합동해 교명을 ‘중앙학교(中央學校)’라 했다.

이번에 공개하는 자료는 홍순석 교수가 2013년도에「영일정씨주부공파30년사」를 편찬하면서 수집한 자료들이다. 그동안 정리를 못해서 공개되지 못했다가「용인향교지」편찬 자료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공개하게 된 것이다. 용인지역의 향사례를 살필 수 있는「향약」도 확인돼 현재 간행을 추진 중인「용인향교지」에 전재할 예정이다.

홍 교수는 이제까지 이광섭, 홍승혁, 김건중, 이영희 씨 등 용인지역 원로들이 소장하던 사진첩과 향토사 자료를 수집 정리해 왔으며, 향후 정리 되는대로 공개할 예정이라고 한다.

정필영(1929~2010) 선생은…

일제강점기였던 1929년, 처인구 남동에서 태어난 선생은 성균관대를 졸업한 후 줄곧 고향인 용인에서 교육현장을 지키며 후진양성에 힘써왔다. 교직생활 중 용인중·고에서 20여 년간 사회영역 과목을 가르쳤으며, 원삼중학교 교장을 마지막으로 정년퇴임 했다.

용인 향토교육의 큰 스승인 정필영 선생은 특히 정년 후에도 야학 <용인향토학교>를 맡아 어려운 환경 속에 교육기회를 놓친 청소년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기회를 마련했다. 이들 중 수백 명이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 또는 사회에 진출할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

지역문화와 지역언론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 성산신문사(현 용인신문 전신) 주필을 한 동안 역임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성균관대 학생 신분으로 용인군 학도의용대장을 맡아 활동하는 등 평생 용인지역을 지켜온 교육자이자 현대사의 산증인이다.

선친 정우용 선생 역시 고종 때 용인 근대교육의 스승 맹보순의 제자로 신교육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던 교육자 집안이었다. 정필영 선생은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으며 2010년 81세로 별세했다.
 

정필영 선생(사진 앞줄 맨 왼쪽)과 지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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