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이야기

잠자던 경안천가의 버들가지 나무에도 봄은 찾아 왔다. 그동안 움츠렸던 가지마다 콩알만하던 솜털이 부풀어 오르면서 잔설에 밀려 내려오던 조용한 봄물을 맞아 제법 통통하게 꽃망울이 부풀어 올랐다. 이내 터질 듯하다.

나는 오늘도 여느 날처럼 아내에게 미안했다. 항상 집안 일로 쉴 새 없이 바쁘게 손놀림을 하는 아내를 부추겨 경안천 걷기에 나섰다. 하지만 집을 나서는 순간 우리 두 사람은 각각 남이 된다. 나는 잉크 냄새가 채 가시지도 않은 찢겨진 조간의 큼직한 활자 ‘박근혜, 사실상 탄핵불복 선언’에 ‘한미 FTA를 누가 매국이라 외쳤나’ 하는 기사들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겼다. 애초 동행이란 나란히 길을 같이 가는 것으로 몸을 움직여 반복되게 발로 걷는 동작이나 내손에는 책 대신 구겨진 신문들이니 말대로 동행은 분명 아니다.

“여보 미안 하오. 이길 오가며 마주치는 사람들처럼 우리도 오순도순 말을 주고받으며 걸어야 하는데…” “아니 괜찮아요. 이것이 있으니 심심치 않아요, 어서 읽고 집에 가서 이야깃거리 말해주세요” 하고 흔연스레 응대해 준다. 고마웠다. 사실 지난해 가을 청계천에 들려 카세트 형 오디오 스피커를 사다주면서 “경안천 걷기에 나서면 나는 책(신문) 읽고 당신은 이 오디오 들으며 즐기기를 바라오”하고 미안한 인사를 나눈 지도 꽤나 오래된다. 걷다보니 어느새 경안천 서쪽 길의 오른쪽으로 하얀 모텔 건물의 윗부분이 보이기 시작하니 한 시간 가까이 족히 걸은 셈이다. 등에는 살포시 모여든 땀방울들이 내의를 축축하게 적셔준다.

잠깐 눈을 돌린다. “여보 미안하오, 오늘도 새로운 소식이 많았소. ‘스카이라인까지 바꿔 관광명소가 되었다는 도쿄’, 지난 날에는 도교는 관청가로 밤에는 빈 공간이었다고 하오. ‘전쟁터 같은 서울대의 봄’, 트럼프 이야기에 ‘중간에 밥먹고 보는 연극’, ‘산삼 팔러 소아병동 갔다가 6년간 85뿌리 기증한 심마니’ 이야기로 가득차서 눈을 뜨지 못했소. 새로 듣는 것이 신문이라 하더라도 너무도 많은 읽을거리에 빠지다보니 여기 오기까지 한마디 말도 없이 왔군요. 정말 미안해요” “아니에요. 방금 장사익 씨의 편곡된 구수한 노래들을 들었어요” 하는 맑은 목소리가 나를 안심 시킨다.

빨간 자켓에 검은색 바지에 날렵한 검은 선글라스가 한층 잘 어울린다. 앞서 걷는 그녀, 아내의 균형 잡힌 뒷모습이 한결 믿음직스러워 보인다. 방금 옆으로 부부인 듯한 한쌍이 어깨를 맞댈 듯 하며 뭔가 우스운 말들이 오갔는지 웃음의 여운이 내 귓가로 밀려온다. 저들은 말을 주고받으며 웃고 지나가는데 하고 앞서가는 아내에게 미안한 감이 다시 이것저것과 같이 엉켜 온다. “여보 이것 보아요. 여기 두더지 보 칸도 공사가 시작되었나 봐, 그동안 강바닥 한가운데 우뚝 서 있어 물 흐름을 가로막고 있던 큰 돌덩어리들이 치워지니까 먹이 찾아온 오리 떼들의 만찬장이 되었네요”

“으응, 많군요, 여기는 그동안 물이 말라 강바닥이 보이기 시작했고 이대로 가뭄이 계속되면 물이 밭아지게 생겨 걱정했는데 용인시 나리들이 내 마음 알아 물 받음 자리를 저렇게 아름답게 꾸몄네요, 항상 용인시민들의 복지 향상에 마음 쓰는 이분들께 감사를 보냅시다. 이 칸도 얼마 지나면 물이 담기게 되겠군요” 하고 일부러 말을 길게 이끌어 보았다, 아내와의 말을 조금이라도 길게 해 외로운 여자를 면해 주려는 얄팍한 마음 씀 이었다고나 할까!

경안천 서쪽 길 따라 시청역 쪽으로 걸어 올라 ○○다리 앞에서 되돌아오기까지 2시간 남짓 걸린다. 출구 쪽에 마련된 여러 가지 운동기구로 운동하기 30분. 도합 거의 3시간. 요즘 들어 결석하는 날이 많아 걱정이다. 결산해 본다. 2시간 넘게 조간이나 신간소설에 문예월간지에 밑줄 치면서 읽다 보면 거의 반 넘게 읽어 대니 굉장한 수확이다. 사실, 하루를 하는 일 없이 바쁜 체 하면서도 요즘의 시끄러운 정치 스캔들 보기, 듣기에 시간을 뺐기고 나면 마음 놓고 책 읽는 시간 없이 하루해가 저문다. 걷기를 빠지는 날도 그렇긴 하지만.

허나 경안천 걷기에 나서면 사정이 확 달라진다. 올핸 제법 많은 분량의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지난해에는 나름대로 채점하면 70점은 된다고 자부하면서 올해는 독서하기 80점의 해로 삼으려 한다. 웬만하면 만사 제쳐두고 책 읽는 경안천 걷기에 틈을 내려 애쓰나 여기에는 나 홀로가 아닌 아내와도 시간 조율이 잘 돼야 한다는 조건이 항상 뒤따른다. 이런 오밀 조밀한 생각들을 따져보면서 뒤따르는데 “여보 갈대와 억새가 어떻게 다른지 아세요”, “여기에도 오리가 많이 몰려 있네요” 하고 새로운 소식에 경안천 주변에 깔린 이야기를 한마디씩 뒤돌아 보고 해준다. 이럴 때마다 그처럼 고마울 수가 없다. 책 읽는다는 눈치를 보지 않아 좋아 마음이 편안해진다.

경안천의 동행은 걸으며 책 읽는 보람도 있지만 바로 우리 두 사람의 아름다운 미래의 그날까지도 맞아줄 벗이라는 생각으로 이렇게 빌고 싶다. “꽃샘추위가 물러갔으니 제발 여기 경안천에 꽃 틔우는 봄비를 흠뻑 내려 주시옵소서…” 하고.

저작권자 © 용인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