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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후예들 귀화, 우리나라 ‘곡부 공씨’
  • 이종구 향토사학자
  • 승인 2017.01.12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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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동 고원사

공씨의 기원

우리말과 글로 공씨는 두 성이 있는데 한 성은 공(孔)씨, 다른 한성은 공(公)씨이다. 후자의 공(公)씨는 김포 공씨로서 희성이기는 하나 김포에 대대로 세거해온 성씨이다. 전자의 공(孔)씨의 본관지는 중국 산동성에 있는 곡부(曲阜)이며 세계 4대 성인 중 한분인 공자를 시조로 하고 있는 성씨이다. 공자의 후손들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그 수가 400여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나라 공씨는 1351년(충정왕 3년) 시조로부터 53대손인 소(紹)공이 원나라 한림학사(정4품관직)로서 공민왕과 결혼한 노국대장공주와 함께 고려에 왔다가 귀화해 우리나라에 공문을 열게 됐다.

소공은 귀화 후 문하시랑평장사(정2품 관직)를 역임하면서 회원군(檜原君)에 봉해지고, 회원(檜原, 지금의 창원)을 식읍(食邑)으로 받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한국 곡부 공씨의 시원을 이루고 후손들은 본관을 식읍인 창원으로 해서 계대를 이어오고 있다. 그 후 조선조 22대 왕인 정조(1794년) 임금이 “창원 공씨는 본래 공자의 후손인데 본관을 창원으로 하기보다 성현의 후예로서 본관을 곡부로 함이 마땅하다”해 정조 이후 창원 공씨들은 본관을 곡부로 하게 됐다.
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는 경우는 많으나 본관을 하사 받는 경우는 곡부 공씨가 유일하다. 곡부 공씨의 중시조 소공의 본명은 소(昭)였는데, 이는 고려 4대왕 광종의 이름이 소(昭)였으므로 광종의 이름을 피해 소(昭)를 소(紹)로 개명했다고 한다. 조선조에 들어와 문과 합격자 8명, 무과 급제자 25명을 배출했다. 2000년 통계에 의하면 곡부 공씨의 수는 8만3164명이며 인구 순위로는 56위에 해당한다.

오산 권리사

가문을 빛낸 인물들

시조공은 아들 공여와 손자 둘을 뒀는데 큰 손자는 부(?~1416)이고, 작은 손자는 은(생몰 미상)으로 모두 현달했다. 아들 공여(孔帤)는 고려 말 우왕 2년에 문과에 급제해 상장군(무관으로 종3품), 평장사(정2품)를 역임한 인물이다.

큰 손자 공부가 예빈시판서(손님을 대접하는 관청의 정2품 관직)로 재직할 때 개국공신인 조준(趙浚)이 음식이 깔끔하지 않다고 공부에게 죄를 물어 때리려하자 공이 말하기를 “내가 잘못해 죄 받는 것은 마땅하나 어찌 재상으로서 음식 때문에 조정의 벼슬아치를 매질하는 경우가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조준이 벌주기를 그만뒀다는 일화가 조선 후기에 쓰인 <연려실기술>에 전해진다.

둘째 아들 공은(孔隱)은 우왕 6년 문과에 급제해 급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냈는데 역성혁명에 함께한 형과 달리 두문동에 들어가 역성혁명에 반대한 인물이다. 조선은 공의 학덕과 국량을 높이 사 출사할 것을 권유했으나 끝까지 출사하지 않다가 결국 전남 여천군 삼일 낙포리로 유배돼 그곳에서 일생을 보냈다, 공은이 죽기 전 기러기 두 마리가 하늘을 날며 애통해하며 울다가 그가 운명하자 바다에 떨어져 죽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로 인해 현재 삼일읍 낙포리라는 지명 유래가 됐다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문과 급제자 8명, 무과 급제자 25명을 배출했다. 유명 인사로 부의 손자 성길은 한성윤을 역임했다 한다.

공서린(孔瑞麟, 시호 문헌, 1483~?)은 곡부 공씨가 자랑하는 인물이다. 아울러 용인의 기묘명현(음애 이자, 정암 조광조, 십청헌 김세필, 졸옹 이성동, 회곡 조광좌) 중의 한분으로 용인 사람들이 추앙하는 인물이다.

공은 어려서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507년 생원이 됐다. 그해 식년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아가 경기도관찰사, 대사헌(사헌부의 의뜸 벼슬로 종2품)을 역임한 인물이다. 공은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날 때 승지를 역임하고 있었는데 여러 대신들과 함께 투옥됐다가 풀려나서는 이성동, 이청 등과 함께 대궐에 나아가 청하기를 “조광조 등이 죄가 있다면 우리도 함께 옥에 갇혀 죄를 받겠습니다”라고 추청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옳은 것은 옳다 말하는 선비의 기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일화이다.

공성학(孔聖學, 1879~1957)은 어려서 한학을 배워 시문에 능통했고 벼슬길에 나아가 성균관 부제학을 역임했다. 특히 일본 자본이 유입돼 민족자본이 잠식당하자 1910년 이후 고려인삼 주식회사, 우리나라 최초의 전기회사인 개성전기주식회사, 송도고무, 개성양조, 개성삼업주식회사 등을 설립해 운영한 민족기업가이다.

공은 특히 우리나라 인삼 품종개량, 삼포경영방법 혁신을 주도했으며 인삼 해외 판매에 공로가 큰 인물이기도하다. 그밖에 인물로 항일 애국지사 공수, 제25대 외무부장관을 역임한 공로명, 제6대 해병대사령관을 역임한 공정식, 무용가이며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공옥진 등이 공부 공씨의 가문을 빛내고 있다.

남사면 완장리 공서린 묘

곡부 공문이 남긴 흔적들

어느 문중이건 여러 계대를 이어오면서 정려문, 문집 일화 등 많은 흔적을 남기며 나름대로 조상 유훈을 받들며 후손들에게 전하고 있다. 곡부 공문의 흔적으로 대표적인 것은 권리사(闕里사)를 들 수 있다. 권리사는 공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중국 산동성에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에는 강릉 제천, 오산 논산에 있었으나 현재 논산과 오산에만 남아 있다. 이 권리사는 공씨뿐만 아니라 유학을 숭상하는 사람이면 언제나 참배하고 싶은 곳이라 한다.

오산 권리사를 창건하게 된 일화가 전해진다. 정조 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 능에서 아버지를 그리며 멀리 남쪽을 응시하고 있을 때 많은 새들이 울면서 한곳으로 모이는 것이 눈에 띄었다한다. 이를 괴이하게 여기며 가보니 죽은 은행나무에서 새 싹이 돋아나고 있지 않은가? 이곳은 중조 때 명현인 공서린이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뜰 안 은행나무에 북을 달아놓고 문하 제자들이 게을리 하지 않도록 깨우치며 교수하던 곳인데 공이 죽자 은행나무가 따라 죽었다고 한다. 이를 본 정조대왕이 곡부 공씨의 시조인 공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짓게 하고 사당 이름으로 궐리사(闕里祠)라는 현판을 하사하게 됐다고 한다. 지명을 권리로 하게 해 지금의 오산시 권리동이라는 지명이 만들어졌다 한다.

또 대성전은 공자를 주벽으로 중국,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한양의 성균관, 각 고을의 향교에 설치된 일종의 사당이다. 모든 씨족들은 자신들 조상의 위패가 대성전에 봉안돼 있는 것을 가문의 명예로 알고 있는데 곡부 공씨들은 자신들의 시조인 공자가 이곳 맨 윗자리로 봉안된 것을 큰 자랑으로 삼고 있다.

용인의 곡부 공씨 세거지

용인에 서거해 오고 있는 곡부 공씨 세거지는 처인구 남사면 완장리 일원과 기흥구 상하동 일원에 씨족촌을 이루며 거주해오고 있다.

처인구 완장리에 선대 묘소로 시조공으로부터 61세 손인 공숙(孔淑)과 그의 아들 영의정에 증직된 공제로, 64세 손 문헌공 공서린의 부친이며 우봉현령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추증된 공의달, 64세 손이며 곡부 공문을 명문으로 이름을 드높인 기묘명현 중 한 사람인 공서린의 묘가 있다.

남사면 창리에 공서린의 백부이며 목사를 역임한 공인달(孔仁達)의 묘가 있으며, 상하동에는 문헌공 공서린의 손자이며 선무랑(종6품)에 오른 공미수(孔眉壽), 용양위 부사과(군조직의 6품 관직)에 오른 공도전(孔道傳), 68세 손이며 참봉을 지낸 덕일(德一)의 묘가 있다.

공서린 필적

용인에 곡부 공씨가 언제부터 세거했는지에 대한 기록이나 전하는 이야기가 없어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선대 묘소와 족보를 상고 해보면 완장리의 곡부 공씨 씨족촌은 공서린의 증조부인 공숙(孔淑)의 묘가 이곳에 있는 것으로 추정해 보면 약 600년 전부터 세거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상하동에 가장 오래된 선대묘가 문헌공(공서린의 시호)의 손자인 공미수(공미수)의 묘가 있다. 그의 묘비에 ‘공은 1580년경 완장리에서 낙향하여…’라고 기록한 것으로 봐서 상하동 공씨들은 완장리로부터 이거해음을 알 수 있다. 약 450여년 전부터 세거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용인 출신으로 사회에 기여한 인물로 정조 연간에 알성문과에 급제하고 병조좌랑을 역임하고 통정대부(정3품 품계)에 오른 공윤항(孔胤恒)이 있다. 광복 후 지방자치를 실시할 때 구성면장을 역임한 공석근, 경기도 각지에서 교장을 역임한 공도영, 은행장을 역임한 규식·창식 형제가있다.

1960년대 처인구 남사면 완장리 일원에 30여호, 기흥구 상하동에 20여호가 있었으나 현재 완장리에 10여호, 상하동에 7~8호가 남아 선산을 지키고 있다. 이들은 30여기의 선조 묘소를 지키고 있으며 음력 10월이면 50여명이 모여 시제를 모시고 있다 한다.

이종구 향토사학자  webmaster@yongin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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