잣나무 숲

지난해 겨울 아침, 어디선가 나를 깨우는 소리에 창문 너머 뒷산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그곳에 멋진 설경이 펼쳐져 있었다. 모두가 잠든 시간에 눈이 내려와 한 폭의 진경산수화를 그려놓은 것이다. 고요하던 숲속의 나무들이 눈꽃을 피워내느라 한바탕 분주하게 소란을 떨면서 나의 아침을 일으켜 세웠고, 그때에 바라본 숲의 정경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두 팔을 가득 벌리고 눈 세례를 받고 서 있는 잣나무였다.

눈앞에 펼쳐진 잣나무 숲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백석 시인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 봉방> 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북방의 눈 내리는 마을 정취가 깊게 와 닿아서 즐겨 읽는 시인데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라는 시구에서 눈의 이미지가 그려졌다.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살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는 시구에선 갈매나무의 이미지가 그려지는데 순간, 시인의 그 갈매나무가 보고 싶어지다가 이내 잣나무를 생각한다.

잣나무는 불리는 이름이 다양하다. 잎이 5개라 오엽송, 나무 속이 붉어서 홍송, 그리고 열매가 크다고 해서 과송 등으로 불린다. 그 큰 열매엔 전통음료인 식혜나 수정과에 띄우거나 잣죽을 해서 먹는 잣이 들어 있다. 숲에 있는 다람쥐가 좋아하는 먹이로 앙증맞은 이빨로 잣을 빼어먹는 것을 상상하기만 해도 귀엽다. 다람쥐가 먹고 난 후의 잣방울은 우리가 숲에 가면 볼 수 있듯이 그 모양이 그대로 유지된다. 그런데 사람이 잣을 빼기 위해서 인위적인 힘을 가하면 열매의 모양은 일그러지고 만다. 우리가 숲에서 나는 것들을 고맙거나 미안한 마음 없이 맛 좋고 몸에 좋다는 이유로 취하는 것이 마치 잣방울의 자연 그대로를 망가뜨리는 것 같은 행동은 아닌지 돌이켜본다.

잣나무는 소나무속인데도 소나무에 비해서 뿌리의 깊이가 얕은 편이다. 예전에 포천과 우면산 일대가 산사태로 피해를 입었는데 이곳에 심은 것이 주로 잣나무였다. 특히 포천 남청 산자락은 녹화사업 때인 1970년대 심은 것으로 이때 심은 잣나무는 전체 나무의 90%를 차지했다.

잣나무는 열매를 얻고 비교적 잘 자라 목재도 얻기가 쉬운 장점이 있어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에 선택했을 것이다. 잣나무는 잎이 햇빛을 가리는 경우가 많아 나무 밑에 다른 식물이 자라지 못해 폭우가 쏟아지면 물의 속도를 줄여줄 요소가 없어 안타까운 산사태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잣나무의 이와 같은 특징을 잘 알고 나무와 주변 환경의 조화를 생각해 심어야 한다. 그것은 마치 교육이 백년을 내다보고 계획하고 진행해야 하는 것처럼 나무를 심는 일도 이와 같아야 한다.

잣나무와 비슷한 종류로 스트로브 잣나무도 있는데 가장 큰 차이점은 열매에 잣이 달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열매에는 소나무 씨앗과 비슷하게 생기고 날개가 달린 씨앗이 들어있다. 잣나무의 신념처럼 꽉 찬 잣이 달리는 것은 오로지 우리나라 원산의 잣나무밖에 없다. 지조와 절개를 갖춘 듯이 추운 계절에도 힘차고 곧게 뻗은 줄기와 나뭇가지로 푸르름을 선사해주며 생동감을 불어 넣어주는 잣나무, 지금 눈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변신 중이다. 그 푸른 옷에 흰 연미복을 갖춰 입고 위풍당당 걸어 나와 지휘를 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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