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에 첫눈이 왔어”
강원도에 사는 친구로부터 온 문자였다. ‘우와, 정말?’ 하고 나는 감탄하는 문자를 바로 보내주었다. 눈이라는 말만 들어도 설렌다. 맨 먼저 떠오르는 풍경이 설원의 자작나무였다. 가을이 깊어갈 무렵 그곳에서 봤던 노란 잎을 매달고 있던 자작나무도 그 잎을 모두 내려놓고 뿌리에 집중하는 시간으로 돌아가겠구나 싶었다. 영화 <닥터지바고>에서 라라, 음악, 눈 그리고 하얀 수피의 자작나무가 시베리아를 배경으로 펼쳐진 장면이 함께 떠올랐다.

실제로 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커다란 자작나무를 봤던 기억이 난다. 예전에 이웃나라 일본 훗카이도에 갔을 때 그곳의 한 마을에서 봤던 자작나무는 정말로 인상적이었다. 수백 년은 됐음직한 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고 커다란 둥치는 사람의 몇 배는 돼 보였다. 자작나무가 펼쳐진 황홀하기까지 한 진풍경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숲에 들어가 있으면 자작나무가 나무라는 느낌이 들기보다는 마치 하얀 옷을 입은 천사 같기도 하고 숲속에 사는 전령 같았다. 그때에 그 아찔할 정도로 생생한 자작나무의 멋들어진 수형과 그곳에서 풍겨나는 비장함은 다시금 그때 그 시간 속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자작나무는 미인나무로 불린다. 다른 나무에 비해서 미인으로 여겨지는 것은 하얀 나무껍질, 즉 피부의 아름다움 때문이다. 자작나무를 부르는 다른 이름도 숲 속의 가인, 귀족, 여왕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자작나무는 우리가 사는 곳 주변에선 자생하지 않기 때문에 주로 정원수나 호숫가의 조경수로 활용된다. 요즘에는 아파트 정원수로 인기가 좋다. 겨울에 길을 지나다가 짙은 검은색 수피를 가진 나무 사이로 하얀 나무껍질의 자작나무를 만나면 그 곁을 지나는 이의 마음까지 절로 환해지게 해주는 것이 자작나무이다.

자작나무 이름은 껍질에 기름기가 많이 있어서 나무 껍질을 벗겨내 불을 붙이면 ‘자작자작’ 소리를 내며 잘 탄다고 해서 붙은 것이다. 옛날에 초가 없을 때 자작나무 껍질에 불을 붙여 어둠을 밝히고 혼례를 치른 데에서 유래한 것이 ‘화촉을 밝힌다’인데, 노래 가사에 나오는 갑돌이와 갑순이의 사랑이 이뤄졌으면 그 한 꼭짓점에 자작나무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수많은 ‘장삼이사’의 혼례가 치러지는 동안 자작나무가 밝힌 사랑의 변주곡은 얼마나 많았을까 생각하니 자작나무가 커다란 의미로 다가온다. 서양에서는 자작나무의 새하얀 껍질을 벗겨 편지를 써서 보내면 사랑이 이뤄진다고 믿어왔다고 한다. 이처럼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작나무는 사랑의 가교 역할을 한다.

자작나무는 사랑의 가교 역할을 한 것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자작나무는 보는 이로 하여금 순정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하얀 것이 주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마음을 상징하는 자작나무, 어느 시인의 시처럼 오래봐야 사랑스러운 대상으로 다가오는 나무이다. ‘사랑’이라는 말은 한자 ‘思量(사량)’이 변해서 오늘날 사랑이 된 말이다. 자작나무는 생각하고 헤아려지게 하는 나무인 것이다.

수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에 등장하며 좋아하는 자작나무. 자작나무 자체가 가을날에 황금색을 매달고 있을 때면 독특한 분위기의 예술가가 연상된다. 시에도 많이 인용됐는데 그중 필자가 좋아하는 백석 시인은 시 <백화>에서 고향 평안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백화(白樺)는 자작나무를 일컫는 말로 그곳에 그 나무가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볼수록 정감이 넘치고 사랑이 느껴지며 내면의 아름다움이 외면까지 우러나오는 나무, 그래서 더 오래 곁에 두고 보고 싶어지는 나무가 자작나무이다. 추운 계절, 그 하얀 수피에 담긴 사랑의 언어들을 헤아리면서 따스함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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