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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속 깊이 뿌리박은 백제문화의 혼을 느끼다용인시민신문과 떠나는 가을 테마여행
  • 정양화(향토사학자)
  • 승인 2016.10.13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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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가 마련한 역사테마기행 <일본 속 백제문화의 혼을 찾아서>가 25명의 참가 속에 성황리 마무리됐다. 지난달 23일부터 26일까지, 3박 4일간 규슈지방 일대의 백제 유적을 찾아나선 바쁜  일정이었지만 우리 조상들의 우수한 문화적 숨결을 느끼고 동시에 힐링의 기회까지 함께 얻은 소중한 시간이었다. 기행단장을 맡은 정양화 용인문화원 부원장의 기행문을 통해 독자 여러분과 그 여정을 같이 해 보고자 한다. / 편집자

귀국길에 부산항에서 단체사진

#희망과 수난 뒤얽힌 뱃길 관부(關釜)연락선에 몸을 싣고

 
지난달 23일, 밤 11시가 다되어서 부산항을 떠났다. 갑판에서 보니 부산의 야경이 불야성이다.  어둠속 부산항 불빛은 우리나라 관문이자 국제도시의 위상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타고 가는 배는 뉴카멜리아호다. 카멜리아는 동백꽃을 뜻하는 말인데 부산의 시화(市花)라고 한다.

일본측 관문인 시모노세키(下關)의 시화도 동백꽃이라고 하니 배 이름은 제대로 지은 것 같다.
한국과 일본, 정확하게는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이어주는 항로에는 부관(釜關)페리가 다니고 있다. 일제시대부터 운행되었으나 광복 이후 잠시 끊어졌다가 운행이 재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예전엔 관부(關釜)연락선이라고 했다.

청운의 꿈을 안고 도쿄로 유학을 떠나는 학생들이 이 항로를 거쳤고 강제징병이나 징용으로 끌려가는 젊은이들도 이 노선을 지났다. 심지어 정신대로 끌려가는 어린소녀들도 뱃바닥에서 멀미에 시달리며 이 곳을 지나야 했다. 때문인지 몰라도 기쁨과 희망의 뱃길이 되었기보다 고통과 수난의 항로였다고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다.

부산포에서 하카다로 향하는 항로는 오래전부터 두 나라를 이어주던 길이다. 백제의 유민들도 이 바다를 건넜고 조선을 침략하는 왜군들도, 왜란 이후 조선통신사 역시 이 뱃길을 통해 오갔다. 흔히 부산에서 일본으로 건너가는 것을 현해탄을 건넌다고 표현한다. 우리 일행은 갑판 위에 서서 잠시나마 현해탄을 건너던 선조들의 숨결을 느껴본다.

도조 이삼평비. 임진왜란 일본으로 끌려간 그는 일본 도자기의 신(神)으로 추앙 받고 있다.

# 백제선조들의 숨결 깃든 곳 오노죠(大野城)와 규슈박물관

규슈의 관문은 후쿠오카이다. 일본 내에서도 손꼽히는 항구이자 대도시다. 하지만 항구의 명칭만큼은 예전의 하카다라는 이름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후쿠오카에서 제일 먼저 찾은 곳은 간젠온지(觀世音寺)이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고색창연한 건물과 아름드리 고목이 우리 일행을 맞는다. 간젠온지에는 따로 절의 유물을 전시하는 보물전이 있을 정도이고 나라시대에 창건되었으니 역사도 오래다.

일찍이 용인에 묘소가 있는 포은 정몽주 선생이 규슈에 사신을 가서 구주탐제(九州探題)를 만나 왜구의 피해방지를 요구하고 잡혀갔던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왔던 사행(使行) 당시 찾았던 절이기도 하다.

이어 다이자후(太宰府)터를 지나 굽이굽이 먼 길을 돌아 오노죠(大野城)터를 찾았다. 가파른 지형을 이용해 돌로 쌓은 성벽이 우리 주위에 남아 있는 산성의 모습과 똑같다. 백제 멸망 이후 나당연합군을 의식해 쌓은 성인데 태재부의 뒤편 산 위에 있다. 백제의 기술과 장인들의 노력이 들어갔다고 한다. 머나 먼 타국에서 이제는 갈 수 없는 사라진 조국을 생각하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어 학문의 신을 모신 다이자후 텐만구(太宰府天滿宮)와 규슈박물관을 찾았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와 관련이 있는 유물을 전시하고 있었다. 일본에 있는 박물관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역사가 오래된 유물일수록 우리와 닮은 부분이 많다는 점이다. 삼국의 영향, 특히 백제의 영향이 매우 크기 때문이라는 확신으로 다가온다. 기록은 왜곡하고 자기 멋대로 해석할 수 있지만 유물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전시실은 나오는 출구 앞에 다이자후를 둘렀던 수성(水城)의 배수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나무로 만들어진 배수관의 두께도 매우 두껍지만 크기도 엄청나다. 수성 역시 앞의 오노죠와 함께 쌓았던 백제식 토성이다. 다이자후 텐만구에는 인파가 넘치고 있다. 특히 중국관광객이 큰 폭으로 늘어나면서 여기저기 중국말이 들린다. 또 깃발을 따르는 행렬이 줄을 잇고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여러 개의 도리이(鳥居)를 지나 경내로 들어간다. 도리이는 우리의 홍살문이나 사찰의 일주문과 연결지어볼 수 있는 시설물이다. 일본의 경우 사찰에는 없고 오직 신사에만 있다고 한다.

오후엔 구마모토에서 시마바라로 페리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 약 1시간이 못되는 짧은 거리지만 바다를 건너는 기분이 육지를 달리는 것과는 또 다른 맛이 있다. 이어 운젠(雲仙)시에 있는 화산 후겐다케(普賢岳)의 분화로 인해 매몰된 주택들을 공원으로 만들어 놓은 미즈나시 혼진마을을 관람했다. 안내판에 분화전후의 모습을 대비시켜 알기 쉽게 전시해 놓았는데 지붕까지 토석으로 매몰된 것을 보면서 인간이 자연 앞에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 좀 더 겸허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다. 화산이 터진 곳은 정상부분에 새로 산이 생겨났다. 예전보다 훨씬 높아졌다고 하는데 이 봉우리를 헤이세이신잔(平成新山)이라고 부른다. 현재 일본의 연호인 헤이세이를 따서 생긴 이름이다.

이어 구불구불 산길을 한참이나 달리니 오바마(小浜) 해변이 나타난다. 여기저기 온천에서도 수증기가 오르고 있다. 거리의 유황냄새도 자극적이다. 작은 바닷가 온천마을의 석양이 아름답다. 구름이 낀 석양도 아름다운데 날씨 좋은 저녁의 낙조는 얼마나 더할까. 저절로 시 한편이 나올 것 같다.

 

화산으로 매몰된 주택(미즈나시 혼진마을)

# 나가사키 개항 특구, 선진국 일본의 디딤돌

나가사키는 쇄국정책이 실시되었던 막부 당시 외부를 향한 유일한 통로였다. 우리나라가 철저한 쇄국정책을 시행했다면 일본은 나가사키 앞바다에 건설한 인공섬인 데지마(出島)를 통해 제한적이나마 교역을 허용했다. 일본 땅에는 오르지 못하게 하고 일종의 특구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상품뿐만 아니라 서양의 발달된 학문까지 유입되어 난학(蘭學)이 유행하고 일본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비록 제한적이지만 아예 막아버리는 것보다 훨씬 실용적인 접근방법이었다. 일본이 세계적 경제대국으로 발전한 이면에는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이러한 실용적인 정책이 큰 몫을 했을 것이 틀림없다.

나가사키 평화공원에는 수많은 외국인들과 관광객들이 붐비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북한의 핵실험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온 몸에 띠를 두르고 항의집회를 하고 있었다. 나가사키 원폭투하 당시의 피해자까지 나와 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모든 일엔 원인과 결과가 있게 마련이다. 원인 제공자가 피해만 강조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일본사람들은 가해자가 피해자처럼 코스프레하는 데 아주 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폭자료관으로 올라가는 길에 조선인 위령탑이 있다. 크기도 작지만 설명문도 북한투의 낮선 표기가 눈에 들어온다. 당시엔 나가사키에 조총련이 대세였다고 한다. 그나마 당시에 이렇게라도 만들어 놓았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구문명의 통로였던 나가나키에 당시 과학문명 최고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원폭이 떨어진 것은 역사의 준엄한 심판일까. 아니면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일본 도자기의 신이 된 조선도공 임란 때 끌려간 이삼평

오늘의 일본은 도자기 왕국이다. 하지만 원조는 우리나라이다.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도공을 납치하는 전담부대까지 두었을 정도였다. 왜군은 병졸들이 자기를 깨뜨리면 사형에 처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진정한 의미의 자기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국과 베트남 정도만 생산할 수 있었고 중국을 제외하면 우리나라가 가장 수준이 높았다. 유럽은 18세기까지도 자기를 만들지 못했다. 일본도 임란 이후 끌어간 조선도공들의 손을 빌어 비로소 자기를 제대로 만들게 된다.

도잔신사(陶山神社)를 오른다. 위에는 도자기로 만든 도리이가 서있다. 본전의 현판도 도자기로 되어 있다. 뒤쪽으로 산길을 10여분 오르니 커다란 기념탑이 있다. 탑신의 정중앙에 도조이삼평비(陶祖李參平碑)라고 크게 새겨져 있다. 도조는 도자기의 시조라는 뜻이다. 이삼평은 조선에서 끌려간 도공으로 이곳에서 백자토를 발견하고 일본 최초로 백자를 구워낸 인물이다. 후에 일본이 도자기로 이름을 떨쳤으니 도조로 추앙하고 도자기의 신으로 모시기에 부족함이 없다.

일본에서 이름을 떨친 도공은 이삼평 이외에도 심수관이 있고 박평의가 있다. 박평의의 후손 가운데 일제말기 외무대신을 지내고 패전 후 전범으로 생을 마감한 이가 바로 박무덕, 일본명은 도고시게노리이다.

조선 침략의 전초기지가 되었던 나고야성 흔적.

#임란 조선침략의 전초기지 나고야성

오후에는 가라쓰시에 있는 히젠 나고야(名護屋)성터를 찾았다. 일본에는 나고야 성이 두 군데다. 하나는 나고야시에 있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찾은 곳이다. 한자표기는 다르다. 히젠 나고야성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조선 침략 전초기지로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직접 주둔하면서 왜군을 지휘했던 곳이다.

군데군데 성벽이 무너져 있지만 기본적인 모양은 그대로 남아 있다. 또 보통사람의 눈으로 보아도 한눈에 요새임을 알 수 있다. 주위가 절벽이고 험준한 지형을 잘 이용하고 있는데 천수각이 있던 가장 높은 곳에 오르니 사방이 탁 트이고 조망이 한눈에 들어온다. 또 서북쪽으로 보이는 바다가 바로 앞서 말했던 현해탄이다.

나고야성은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왜란 이후 도쿠가와 막부가 조선에 통신사를 요청하면서 신의의 표시로 헐어버렸기 때문이란다. 1년 이상 나고야성에 머물면서 모국으로 생각하는 백제의 후예 조선을 침략하여 난도질하고 멀리 명나라까지 정복하고자 했던 히데요시의 꿈은 실현가능한 야망이었을까 아니면 과대망상자의 허몽이었을까.

정양화

다시 후쿠오카 시내를 지나 변두리에 있는 리조트에서 숙박을 하고 출항 전 아침을 맞이했다. 하카다 타워에 올랐다. 항구와 주변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래층엔 하카다항의 역사가 연표와 함께 전시되어 있다. 하카다 항을 벗어나는 뉴 카멜리아호의 갑판 위에서 멀어지는 일본 땅을 바라보며 가깝고도 멀다는 표현을 다시 음미해본다. 일본은 좋아도 싫어도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이기에!

정양화(향토사학자)  webmaster@yongin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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