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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지 지원병입소 봉고제
  • 정양화(향토사학자)
  • 승인 2016.09.13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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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고제는 ‘신에게 받들어 고한다’는 뜻이다. 기사의 봉고제는 신사에서 지원병으로 출전하는 것을 신에게 고하는 의식이다. 기사를 보면 용인뿐만 아니라 이천, 평택, 평창이나 김천, 양구, 연천 등 기사에 미처 나오지 않은 것까지 다한다면 전국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원병제도는 1943년에 본격적으로 시행되지만 이미 1938년경부터 지원병의 형태로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을 끌어가기 시작한다. 기사의 용인 부분에는 내사면 양지리의 안전연백(安田然伯)과 포곡면 삼계리의 매전인기(梅田寅基) 두 청년이 육군 지원병훈련소에 입소하게 돼 지난 13일 오후 2시 용인 신명신사에 모여 입소 봉고식을 마치고 같은 날 오후 3시 20분 용인역에서 여주발 열차로 가족과 각 관공서원, 용인재향군인회원, 경방단원, 일반유지, 생도 등 수 백 명의 환송을 받으며 장도에 올랐다는 내용이다.

이때는 이미 일제에 의해 식민지 수탈이 본격화되고 있던 때인데 신사참배의 강요, 황국신민서사 암송, 궁성요배, 조선어 사용 금지, 내선일체사상의 주입, 창씨개명 강요, 조선어교육 폐지, 한글사용 신문과 잡지 폐간 등 일련의 정책들을 식민지 조선에 강요하던 암흑의 시대였다.
아울러 1943년에는 학도 지원병 제도를 강행했고 이어 1944년에는 징병제를 실시해 청년들을 본격적으로 전쟁터로 내몰았다. 1944년에는 여자정신대근무령을 제정해 동원된 여성들을 군수 공장에 보내 강제노역을 시키거나 전쟁터로 보내 군 위안부로 이용하게 된다.

이와 같은 시대에서 용인의 두 청년이 열렬한 환송을 받으며 장도(?)에 올랐던 것이다. 당시 두 청년이 갔던 길은 본인들이 원해서도 아니요, 영광의 길이 아니라 죽음의 길이었음이 분명하니 당시 식민지 치하의 젊은이들이 짊어져야 했던 숙명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무거운 짐이었을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위 두 사람도 분명 우리 배달의 후예이지만 야쓰다(安田)와 우메다(梅田)이라는 일본식 성씨를 쓰고 있다. 본래 안씨와 진씨가 야쓰다와 우메다가 됐던 것이니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 강요했던 창씨개명의 결과인 것이다.

일본의 우경화를 보면서 또다시 가슴에 일본 이름을 달게 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어야 할 것이니 경계하고 경계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정양화(향토사학자)  webmaster@yongin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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