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 마지막 끝자락에 남해안에서 콜레라 환자가 발생했다. 콜레라는 여름철 설사 질환의 대명사인데 실제 국내에서는 거의 볼 수 없었다. 열대 지역 중심으로 유행하는 전염병이었기 때문이다.

후진국적 질병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수인성 전염병이다. 콜레라의 국내 유입을 막기는 힘들 수 있지만 전파 과정은 위생환경과 관련되므로 손 씻기를 철저히 하고 음식 섭취에 주의하면 막을 수 있다.

콜레라 환자와 함께 식사한 사람들이나 가족들이 감염되지 않은 것은 평소 한국의 위생환경이 훌륭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콜레라는 인도 갠지스강 유역의 풍토병이었으나 15세기 이후 서구인들의 활동과 교역이 증가하면서 유럽과 아시아로 확산돼 전 세계적인 전염병으로 큰 피해를 주었다.

우리나라의 최초 콜레라 기록은 조선 중종 19년인 1524년으로 여름부터 이듬해인 1525년까지 서북지역인 평안도 지역 유행이다. 1524년 7월 7일 평안도에서 700여 명의 사망자 발생을 최초 보고한 이후 이듬해까지 2만여 명이 사망했다. 전염병을 무서워한 관리가 도망가기도 했고 평안도 주민수가 크게 감소했다. 특히 병사들이 많이 사망해 국경 병력이 부족해졌다. 정확한 병인을 몰랐기에 돌림병이라는 의미의 여역(癘疫)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후 몇 차례 콜레라 유입이 있었는데 가장 극심했던 시기는 조선 후기인 1821년으로 7월말 평양을 시작으로 8월 서울, 9월에는 충청도 등 전국에서 발병했고 이듬해 5월 다시 유행을 시작해서 제주도까지 전파됐다. 당시 조정은 환자 격리 조치와 구휼을 시행하면서 소합원, 성산자 등의 한약재와 청나라의 치료방법을 도입하기도 했으나 큰 효과가 없어 회복되는 사람은 열에 한둘에 불과했다.

나쁜 악취가 콜레라를 전파시킨다는 생각에서 냄새가 퍼지지 않는 산간 지역으로 피신하기도 했으며 콜레라 환자의 다리 경련 현상을 쥐가 물어서 생기는 것으로 생각해 고양이 그림을 붙이기도 했다. 콜레라는 1822년까지 서울에서만 15만명, 전국적으로 수십만 명의 사망자를 발생시켰고 겨울이 돼서야 진정됐다.

서구도 콜레라에 무력하기는 대동소이했다. 1829년 인도, 페르시아를 거쳐 러시아로 퍼진 콜레라는 1830년 가을에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덮쳐 10만명의 사망자를 발생시켰다. 러시아 정부의 강압적 격리는 시민들의 반발을 불러 폭동이 발생했고 도시를 탈출하는 난민 행렬이 유럽으로 이어지면서 확산됐다. 유럽에서는 장뇌, 목향 같은 약초를 사용하거나 토마토 시럽을 복용하기도 했으나 치료효과는 미미했고 사망률이 70% 이상이었다.

1853년 영국의 존 스노우는 콜레라 환자가 특정 상수도 공급 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을 관찰하고 의심스러운 물 펌프를 폐쇄시켜 콜레라 희생을 줄일 수 있었다. 콜레라가 물을 통해서 전염된다는 사실을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조사를 통해 밝혀낸 사건이다. 당시 유럽도 동양과 같이 나쁜 기운이 질병을 발생시키며 콜레라도 같은 형태로 전염된다고 믿었는데 존 스노우는 공기가 아니라 물이 오염원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콜레라균은 이탈리아의 파치니가 1854년 발견했으나 당시 유럽의학은 나쁜 기운이 질병을 발생시킨다는 미아즈마설이 주류를 형성해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가 30년이 지난 1885년 코흐에 의해 재발견됐다. 1892년 파스퇴르연구소의 하프킨이 콜레라 백신을 개발, 인도에서 사용해 콜레라 사망률을 크게 낮췄다. 그러나 콜레라 백신의 효력은 1~2년에 불과했다. 

우리나라는 구한말 일본에서 콜레라라는 병명이 전해지면서 호열랄(虎列剌)로 음차했으나 마지막 글자를 오독해 호열자(虎列刺)로 많이 부르게 됐다. 근대적 예방법이 도입되면서 위생과 음식 섭취에 주의했음에도 1918년에서 1920년 사이 5만여 명의 환자가 발생, 이중 절반 가까운 2만여 명이 사망했다. 1950년대까지 콜레라는 현대의학적 치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망률이 높은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콜레라균이 모두 콜레라를 유발시키는 것이 아니었고, 심지어 콜레라균 자체는 장을 직접 공격하지도 않았다. 코흐는 콜레라균이 독소를 만들어 질병을 유발시키는 가설을 세웠으나 실제로 확인된 것은 1959년으로 인도 의사 삼부에 의해 밝혀졌다. 콜레라 독소가 장벽 투과도를 증가시켜 설사가 유발되는 것이다.

콜레라 독소에 영향을 받는 장벽 내부로 수분의 재흡수를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설탕 성분이 필요했는데 간단하게 기존 생리 식염수에 설탕을 추가하면 됐다. 놀랍도록 간단한 경구수액요법과 항생제 치료로 콜레라 사망률은 1%까지 떨어졌다. 더 이상 콜레라는 무서운 괴질이 아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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