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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일정신을 이어가는 명문가 연안 이씨
  • 이종구(향토사학자)
  • 승인 2016.09.19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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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인구 이동면 서리 불당골 연안 이씨 태사 첨사공파 재실 연화사 전경.

연안 이문의 뿌리

우리나라에는 300여 성씨가 있는데 과거에 명문거족 하면 달서(달성 서씨), 광김(광산 김씨), 연이(연안 이씨)씨를 3대 명문가문으로 꼽는다. 이들 중 연안 이씨는 조선 초기부터 용인에 뿌리를 내리며 600여 년간 모현, 양지, 이동을 중심으로 세거해오고 있다.

연안 이씨의 본관지는 지금의 황해도 연백군의 옛 지명이다. 지명 변천을 보면 고구려시대 염시성, 신라시대 해고군으로 불리다가 고려 충선왕 때(1310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연안이라 부르기 시작한 지명이다. 그 후 1895년 연안군이 됐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백천군과 합해 지금의 연백군이 됐다 한다.

연안 이씨의 시조는 이무이다. 시조공은 원래 당나라 사람인데 660년(태종 무열왕 1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할 때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부장으로 왔다가 전공을 세우고 신라에 귀화한 인물이다.

이무공은 신라가 삼국통일 후 당나라가 다시 신라를 지배하려 하자 당 장수 소정방에게 신라를 병합하는 것은 다시 전쟁을 해야 하며 이럴 경우 양국에 많은 피해가 불가피하고, 나당연합의 본래 취지에 어긋난다 하면서 부당성을 주장, 설득해 나당전쟁을 피하게 했다고 한다. 이에 신라는 이무공에게 황해도 일원에 1000호를 식읍으로 줘 연안후(延安候)에 봉함으로서 시조공이 신라에 귀화해 살게 됨으로서 후손들은 본관지를 연안으로 삼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시조 이후 수 백년 간 계보가 사라져 세대 구분이 불분명해 후세에 들어와 시조를 이무공으로, 각기 중시조를 1세조로 하며 10여개 파가 독자적인 계보를 갖게 됐다. 10여개 파들 중 고려 의종(1146~1170) 때 소부감판사(종3품)를 역임한 현려를 1세조로 하는 판소부감공파, 습홍을 1세조로 하는 태자첨사공파, 지를 1세조로 한 부사공파 후손 중에 많은 인물을 배출해 이 세 파가 연안 이문을 대표하고 있다.

용인에는 처인구 이동면의 연안 이문은 태자첨공파 후손들이 주류를, 모현과 양지의 이문은 판소부공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연안 이문을 빛낸 인물들

이도재 필적

연안 이씨는 조선조에서 이귀령을 비롯한 상신 9명, 이정구를 비롯한 대제학 8명, 호당(휴가를 주어 독서만 전문으로 하던 곳) 10명, 청백리 7명, 공신 11명, 장신 4명, 그리고 문과급제자 261명을 배출해 우리나라 명문거족임을 자랑하고 있다.

연안 이씨 여러 파 중 판소부감공파가 단연 뛰어나 상신 8명, 대제학 6명, 청백리 1명, 공신 10명을 배출해 연안 이문을 대표하고 있다. 통례문사공파에서 대제학 1명·청백리 2명, 태사첨사공파에서 청백리 2명을 배출했다.

연안 이문을 명성가문 반열에 오르게 한 사람은 저헌 이석형을 들 수 있으며 그 후손인 월사 이정구가 연안 이문을 반석위에 오르게 했다. 월사가 태어나기 위해 어머니가 산고를 할 때 대문 앞에 커다란 호랑이가 와 대문을 지키고 있다가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자 크게 포효하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한다. 이를 본 사람들은 정말 범상치 않은 아기가 태어났다고 기뻐했다는 이야기가 연안 이문에 전해지고 있다.

이런 전설 속에 태어난 월사는 조선시대 4대 문장가 중 한 사람으로 문명을 떨쳤다. 임진왜란 때 외교관으로 명나라가 조선에 구원병을 파견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명외교관, 대제학을 여러 번, 좌의정과 우의정을 두루 역임한 조선시대 명재상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월사의 큰아들인 이명한이 대제학을 역임하고 손자 일상이 대제학을 역임해 연이은 3대 대제학 가문의 영광을 얻었다. 대제학은 정승보다 낮은 관직인 정3품에 불과하나 정승 셋이 한명의 대제학의 명예를 따를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대제학은 조선시대 가장 명예로운 관직으로 모든 이들이 추앙하는 관직 중 하나이다.

그 후 수많은 인물을 배출하며 가문의 명성을 이었다. 특히 일제가 우리나라에 마수를 벌리며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에 격분해 자결로서 국가에 충성한 이설. 이 조약의 무효와 5적신 처형을 상소한 이현섭, 계몽운동과 을사늑약 폐기운동 등을 전개하다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수립에 산파 역할을 한 석오 이동영이 연안 이문을 빛내고 있다.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에 있는 이석형 묘

용인의 연안 이문

용인에 연안 이문의 세거지는 모현면 일원과 양지면 추계리 일원, 그리고 이동면 서리 불당골 일원이다. 연안 이문이 시조를 이무공으로 하며 여러 파로 분류됐는데 모현면 일원과 양지 일원은 현려를 중시조로 하는 판소부감공파, 이동면을 중심한 이문은 습홍을 중시조로 하는 태사첨사공파들이다.

이동면 서리를 중심으로 한 연안 이씨의 입향조는 고려 말 전공판서를 역임했던 이원발이다.
입향조 이원발은 중시조인 습홍의 증손으로 고려 말의 세태가 날로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 인물이다. 공이 돌아가신 후 이곳에 묘를 조성(1349년)한 후 이동면 일원의 연안 이문이 세거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불당골에는 연안 이씨가 몇 집에 불과하나 후손들은 연화사(延華祠)라는 재실을 조성해 시제를 모시고 친족 간에 우의를 다지며 후손들에게 숭조사상을 계승 발전시키고 있다.
모현면 일원과 양지 추계리의 연안 이문은 현려를 중시조로 하는 판서부감공파(판서부감공파)의 후예들이다. 모현에 연안 이문이 세거하기 시작한 것은 중시조 현려의 9세손인 저헌 이석형(1415~1477) 선생의 묘를 능원리에 조성한 후부터라 한다.

모현의 연안 이문 중 사회에 공헌한 인물을 보면 조선시대 문장가로 널리 알려진 월사 이정구가 충렬서원 건립에 공헌했고, 능원초등학교 교가 가사를 지은 현대시조시인 가람 이병기 교수 등이 있다. 이곳에서 태어나 광복 후 능원초교 교장을 역임하며 상급학교 진학을 못하는 학동들을 위해 중학과정인 능원고등공민학교를 건립, 용인애향가를 짓도록 노력한 이정희 선생이 있다.

분수에 넘치는 것을 경계하라는 의미의 계일정 모습

또 능원고공에서 교사로 활동하다 대웅제약 회장을 역임하며 포곡에 대웅제약연수원을 건립해 지역발전에 기여한 이철배 회장이 있다. 용인7위인으로 추앙받는 이시직 선생, 임진왜란 때 호서지방에서 왜적과 맞싸운 이빈 등 연안 이문 후예들의 묘소가 모현 일원에 산재해 있다.
이들 중 몇 명을 꼽자면 입향조인 저헌 이석형(1415~1477) 공을 들 수 있다. 저헌공은 생원 진사 문과에 모두 장원했고, 문신중시에서도 장원한 조선역사상 전무후무한 인물이기도 하다. 저헌공은 조선 최초로 삼장원 해서 임금이 내전에서 축하연을 할 때 중전으로 하여금 어의를 하사하고 궁녀로 하여금 삼장원사(三壯元詞)를 지어 부르게 하며 술을 손수 권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 급제자 발표 후 궁에서 임금이 잔치를 벌일 때 광화문에 들어가야 하는데 광화문 가운데 문은 임금만이 들어가고 생원과는 왼쪽, 진사과는 오른쪽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돼 있었다 한다. 합격자들이 광화문을 들어갈 때는 각기 장원자를 앞세우고 들어가야 하는데 저헌공이 양과를 장원하니 생원과 진사과 모두 저헌을 앞세우려 실랑이를 벌인 일이 생겨 잔치에 늦게 되고 말았다. 이 사실을 임금에게 고하자 세종이 기뻐하면서 중앙에 큰 문을 열고 장원한 자를 들게 하라 해서 저헌공은 임금만이 다닐 수 있는 큰 문으로 들어갔다는 일화가 문헌비고에 전해지고 있다.

저헌공은 벼슬에 있으면서 청렴·강직하기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호패법 확산 실시에 공을 남기고 집 옆에 정자를 짓고, 정자 이름을 분수에 넘치는 것을 경계하라는 의미의 ‘계일정(戒溢亭)’이라 이름했다. 이 정자가 서울이 확대되면서 없어지자 능원리 안골 종손 집에 다시 건립해 계일정신을 기리고 있다.

이 정신은 연안 후손들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이 꼭 갖추어야 할 덕목 중에 하나가 계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선생의 묘 옆에는 우리나라 유학의 시조라 일컬어지는 포은선생의 묘가 있어 많은 이들이 이곳을 답사하고 있다. 답사자들은 대부분 포은 학문과 충절만 생각하는데 이곳에 오는 모든 이들은 꼭 저헌 선생의 계일정신을 배워 가도록 하면 어떨까 생각된다.

그 외 잊어서는 안 될 인물로 대한제국 시기에 군부대신과 학부대신을 역임한 이도재(1848~1909)가 있다. 공은 월사 이정구의 10세손으로 모현면 능원리에서 성장했다. 공이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 동학혁명(당시에는 동학난으로 규정)이 일어나 혁명의 지휘자 전봉준을 생포해 서울로 압송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이후 학부대신을 역임할 때 지석영을 도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학교인 한성의학교 건립에 공헌해 우리나라 의학발전에 기여했다. 1906년 당시 한수 이남을 대표하는 유학자 맹보순이 구성향교에 오늘날 중학교 과정인 명륜학교을 설립할 때 공은 대신으로 있으면서 명륜학교 교장을 역임했다는 이야기가 <명륜학교 일기>에 전해진다. 공은 의학발전뿐 아니라 용인교육 발전에 기여한 공 또한 크다 할 수 있다.

이종구(향토사학자)  webmaster@yongin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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