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지 우리 내부에서는 대한민국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잘못된 풍조가 퍼져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위대한 현대사를 부정하고, 세계가 부러워하는 우리나라를 살기 힘든 곳으로 비하하는 신조어들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지난 15일 대통령의 광복절 축사 내용이다. 마치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금기어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가 신조어들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신조어들이 ‘헬조선’과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대다수 국민들은 이미 ‘헬조선’에 살고 있다. 너무 쉽게 부정적인 풍조를 탓하는 대통령은 ‘딴나라’에 살고 있는가?

오마이티비에서는 그의 연설문 한 줄, 한 줄을 반박하는 ‘살아있는’ 목소리를 영상으로 엮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부르짖는 국회의원 박주민, 정부의 졸속 한일협약을 꾸짖는 위안부 할머니, 경찰의 물대포에 쓰러져 사경을 헤매고 있는 백남기 농민의 딸 백민주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가족, ‘해고는 살인이다. 더 쉬운 해고는 더 쉬운 살인면허다’를 외치며 노동개악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는 젊은이들. 모두 분노와 간절함으로 일그러진 얼굴들이다. 다른 이가 대신 써준 원고를 읽는 사람의 얼굴과는 다르다. 현실의 삶을 살아내는 정직한 얼굴들이다.

올해가 OECD에 가입한 지 20년이 되는 해다. 우리나라는 무려 50개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금메달만 50개라니.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은메달, 동메달까지 다 더하면(?) 더 대단할 것이다. 우리에게 영광을 안겨준 50관왕의 항목들을 살펴보면, 대통령의 광복절 축사를 두고 ‘국뽕 연설’이라 비꼬는 이유를 수긍할 것이다. 자살률, 산업재해 사망률, 가계부채, 남녀 임금격차, 노인빈곤율, 흡연율, 임금불평등, 학업시간, 어린이 청소년 행복지수(낮은 순), 이혼증가율 등이 금메달이다. 노동시간은 근소한 차이로 2위를 차지했다.

경향신문의 만평 ‘장도리’ 18일자에는 청와대 오찬에 올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송로버섯 이야기가 나온다. 값비싼 송로버섯은 개, 돼지가 찾고 사람이 먹는다. (실제로 프랑스에서 송로버섯을 찾을 때 개와 돼지의 도움을 받는다고 한다) 일은 노동자가 하고 그 수익과 공은 재벌, 정치인으로 대표되는 우리나라 1퍼센트가 차지한다. 반면에 노동자에게 주어지는 대가는 ‘경제성장의 자부심과 애국심’이다. 그것도 강요된 것이다. 참, 기가 차는 노릇이다.

심화되는 사회적 불평등으로 갈수록 살기 힘들어지는 나라에서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그래도 희망을 찾는다면 그것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노동조합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기대처다. 반드시 더 커지고 확산되어야 한다.

일제 식민통치와 해방 그리고 분단과 군사정부라는 어두운 역사를 거치며 생겨난 지금의 기득권들은 99퍼센트 노동자들이 뭉치기를 원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부정하고,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며 묵묵히 일하기만을 원한다. 절대 다수의 노동자들이 처해있는 현실은 무시한 채 한강의 기적을 들먹이며 애국심을 강조하는 것은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노동자들이 깨어나 현실을 직시하고 뭉친다면 자신들의 기득권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

구의역 사고를 비롯해 이제 막 세상으로 나온 청년들이 일하다 죽는 사고가 이어지고 있다. 초중고 통틀어 노동인권교육을 전혀 하지 않는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이 낳은 참사다. 다른 나라는 초등학교에서부터 노동교육을 한다. 독일 초등학교에서는 ‘모의 단체교섭’을 1년에 여섯 차례나 실시한다고 한다. 프랑스에서는 ‘일터에서의 투쟁과 협상’에 대해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어떤가?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이 노동교육을 주장했을 때, 당시 한나라당은 ‘학생들에게 이념교육을 하려 한다’며 비난하고 공격했다.

다른 나라에는 경찰노조, 소방노조, 군인노조, 판사노조, 변호사노조 등 우리에게 낯선 노동조합들이 이미 일반화 되어 있다. 심지어 장·차관도 노동조합에 가입한다.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나라로, 유럽의 비웃음을 사는 나라, 미국의 대통령 오바마 조차 노동조합에 가입하라고 권한다.

노동조합은 자신의 권익을 대변하는 단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그래서 이기적인 집단이라는 공격도 받는다. 하지만 노동조합이 사회를 더 밝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실제로 프랑스에서는 판사노조가 생긴 뒤 판결이 더 공정해졌으며 독일에서는 군인노조 덕분에 군납비리, 성희롱, 의문사가 줄어들었다. 이들 나라에서는 경찰, 소방관, 군인, 판사, 변호사들도 자신을 ‘노동자’로 여기고, 사회적 인식도 그들을 ‘노동자’로 본다. 공부를 많이 했거나 직책이 높다고 자신이 노동자가 아니라는 착각은 후진국에서나 볼 수 있는 인식이라고 한다.

대통령의 광복절 축사로 돌아가 보자. “자기비하와 비관, 불신과 증오는 결코 변화와 발전의 동력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를 묶어버리고 우리 사회를 무너뜨리게 할 뿐입니다. 청년들과 비정규직 근로자들을 위해 우리 국민 모두가 자신의 기득권을 조금씩 내려놓고 노동개혁의 물꼬를 트는 데 동참해 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들을수록 기가 막힌다. 우리나라를 무너뜨리는 것이 국민들의 부정적인 정서 탓인가? 노동개혁이라는 말로 치장하고 있지만, 결국 기업이 노동자를 지금보다 더 쉽게 해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이미 벼랑 끝에 내몰린 국민들에게 기득권을 내려놓으라는 말은 추락하도록 등을 떠밀어주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대다수 국민들의 현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딴 세상에 살고 있는 대통령을 모시고 살아가야 하는 99퍼센트 우리들의 신세가 처량하다. 그나마 임기가 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할 지경이다.

저작권자 © 용인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