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크릿타로 5번 교황

5는 고통스럽고 혼란스럽다. 훈련의 시간을 보장해준 안정적인 4의 성(城)에서 바깥의 다른 세상을 만나야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학생에서 직장인으로 진입하는 것과 비슷하다.

다들 노력했고, 나름대로 자신의 능력을 갈고 닦았지만, 서로 비교하면 어떻게 될까? 5는 약육강식의 세계이다. 승자와 패자가 생기게 된다. 하지만 5를 피해서 살 길은 없다. 어디를 가든 세상엔 싸움과 경쟁이 있고, 어려움의 순간들이 닥쳐온다. 5는 자연의 순리를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약한 자는 죽을 것. 용기 없는 자는 사라질 것’이라고.

숫자의 의미를 상징으로 표현하면 1은 점, 2는 선, 3은 삼각형이 된다. 삼각형은 서로 꼼짝없이 묶여있고, 사각형은 팽팽한 대립으로 안정돼 있다. 5는 오각형이다. “정오각형의 대칭성은 생명을 나타내는 최상의 상징이다. 식물, 동물, 사람을 포함해 많은 생명체는 그 구조에 펜타드(Pentad)의 기하학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마이클 슈나이더의 ‘자연, 예술, 과학의 수학적 원형’)

오각형이 되면 안쪽에 별모양의 선을 그을 수 있는데, 그 선은 끊임없이 다음 선으로 이어진다. 자연은 그렇게 돌아간다. 오르다가 내려오고, 성공하고 실패하며, 대립하고 없애면서, 살고 죽기를 반복한다. 동양에서는 이것을 오행(五行)이라고 부르면서 중요한 원리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4의 세상을 원하는 인간에게 5는 힘겹고 벅차다. 그래서 마이너카드 5번의 그림들은 부정적인 의미가 대체로 강한 것이다. 

5에는 순리가 있다. 우연과 필연의 춤사위 속에 다가오는 삶의 이야기와 관계, 변화의 순간들이 마치 세탁기가 빨래를 돌리듯 우리를 돌려댄다. 그리고 거기서 살아남는 자들만이 삶을 살아갈 자격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5는 성인식과 같다. 하룻강아지가 호랑이에게 물려서 자신의 힘을 알아차리게 되는 충격이 있다. 4의 당당함과 자신감이 한순간에 무너지며, 세상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5는 그래서 아프다.
그러나 5를 지나지 않고는 건강한 관계가 있는 6의 세상을 만날 수가 없다. 폐쇄된 성안에서 온실 속 화초처럼 키워진 아이들은 4일 뿐이다. 그들은 부모를 떠나지 못한다. 부모 또한 무서운 5의 세상으로 아이들을 보내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철들지 못한 자기밖에 모르는 4들만 가득한 세상이 된다. 네모반듯한 아파트 우리에서 네모반듯한 길을 따라 그 세상만을 사는 사람들에게 소통은 필수 용품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일만 하며 먹을 것만 챙기면 될 뿐이고, 서로 교류하고 싸우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정의로운 마음은 가질 필요도 없다. 그게 4의 세상이다.
그러므로 5를 알아야 한다. 실패와 성공이 반복되며, 어느 것 하나 이거라고 말할 수 없는 세상. 힘과 권력과 능력이 서로 잘났다고 싸우며, 경쟁과 다툼이 사라지지 않는 무서운 약육강식의 세상을 겪어야 성인이 된다. 우린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또 거기서 어떤 지혜를 짜내며 잘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현재, 내가 생각하는 제일 좋은 지혜는 자신의 한계를 알고 타인과 함께하는 연합이다. 서로 싸워 죽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사랑하며 하나로 묶이는 것이다. 그걸 알면 드디어 사랑의 숫자 6을 가질 수 있다.

아무리 잘난 4로 익힌 강한 힘이 있더라도, 결국 5를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다. 5는 무한한 자연의 힘이며, 우리가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 세상의 순리이기 때문에 차라리 부드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하다. 그것을 깨닫게 되면 교황의 지혜를 얻게 된다. 그런 지혜를 가진 자에게 권위가 생긴다. 싸움을 통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닌, 순리와 함께하며 나와 다른 타인과 손을 잡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오로지 거칠게 삶을 산 사람만이 성인이 된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뼈저리게 느껴본 사람만이 타인의 고마움과 나눔의 필요성을 알게 된다. 그런 사람만이 지혜롭게 선택할 수 있고 함께 할 수 있는 6의 세상으로 나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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