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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일개군의 삼백여 마부 실업
연선으론 칠팔백 명 되어 경동철도 개통영향
향토사학자
   
 

산업이 발달하면 경제활동에도 변화가 생기고 사회 모습도 달라진다. 새로운 문물이 생기면 사회 전반은 물론 개인의 직업에도 영향을 끼치는데 작은 변화가 하나 둘 모이면 나중에는 사회 전반이 변화하게 된다.

디지털카메라의 보급으로 하루아침에 필름산업이 된서리를 맞았고, 인터넷의 보급으로 신문보급이 줄어들었으며 편지와 같은 우편물이 대폭 감소하게 된다. 또 핸드폰이나 팩스 등으로 인해 전보 같은 것은 아예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이와 같은 변화는 예전에도 마찬가지인데 연탄이 보급되면서 용인 시내를 가득 메웠던 나무장사가 사라진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인력에 모든 것을 의지했던 과거에는 지게꾼도, 우마차도 많았다. 우마차는 많은 짐을 실을 수 있기 때문에 멀리까지 화물을 운송하는데 장점이 컸다. 하지만 철도 개통이나 자동차의 보급으로 하루아침에 몰락하게 된다.

기사는 용인에 경동철도가 개통되면서 300여명에 달하던 마차 마부들이 일거리를 잃었다는 내용이다. 즉 수원에서 여주로 이어지는 경동철도가 화물을 운송하게 되면서 기존 우마차 마부들이 일시에 실업자가 돼 생활의 전도가 막연하게 돼 땅을 두드리며 눈물만 흘릴 뿐이라는 것이다.

지난 5일 김량시장에서는 마부들이 모여 일대 소동을 일으켰는데, 내용인즉 용인 수원 간 벼 한가마의 운반비가 오륙십 전이던 것이 별안간 이십 전 미만이 됨으로써 노력은 고사하고 노자도 안 된다고 하는 것이 문제이다.

모두 철도를 이용하게 되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하는데 이천까지 합치면 칠팔백 명이라고 하는 놀라운 숫자를 보이는 것도 중대한 문제라고 하는데 수원 이천까지의 화물 운반액을 본다면 이십오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금액에 달한다고 한다.

경동철도는 일본인들이 투자해 설립한 사철로 예전의 수여선이다. 기사가 보도될 때는 철도가 아직 여주까지 연결되기 이전이다.

마부들에 데모했다고 해서 경동철도가 화물 취급을 중단했을 리 없다. 화주들도 빠르고 값싼 철도 이용을 마다했을 리 없다. 소동을 일으킨다고 해서 뾰족한 대책이 있을 리도 없고 대책을 세워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당시는 일제치하고 식민지 당국이 마부들의 권익보다 경동철도의 이익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을 게 분명하다.

결국에는 마부들이 각자 도생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겠지만 어쩔 수 없는 시대의 변화와 함께 수탈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식민지시대의 단편을 본다.

정양화  webmaster@yongin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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