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에는 언제든지 내줄 수 있는 쌀이 쌓여 있다.
# 어린 시절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

황규열(74)씨 고향은 처인구 백암면 고안리다. 옷샘(칠천)마을에서 장수 황씨 자손으로 15대째  살고 있으니 ‘골수’ 토박이다. 아버지 황승하와 어머니 오명순 사이에서 태어난 그에겐 같은 세대 여느 사람들처럼 인생의 질곡이 뒤따랐다.

황규열이 세상에 나온 일제강점기 1942년은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해였다. 일제의 수탈이 점점 심해지던 시기였고 그의 집안도 더 가난해졌다. 어머니는 오래도록 아파 누워 계셨다. 시골에서 생명줄과 다름없었던 농토였지만 치료비 마련을 위해 아버지는 기꺼이 팔았다. 간절한 아버지의 바람을 외면하고 어머니는 결국 3년의 긴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슬픔과 고통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배고픔에 울다 지친 두 살배기 동생은 햇살이 유난히 환하게 비치던 어느 날 아침, 하늘나라로 떠나고 말았다. “어머니를 여윈데 이어 자식마저 앞세웠으니 아버지 고통이 얼마나 컸겠어요. 죽어가는 동생을 안고 밤새 통곡을 하셨습니다. 저도 따라서 한없이 울었죠.”

몇 해가 지났다. 새어머니를 모시게 됐다. 그러던 차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아버지는 징병돼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가장이 없는 집안, 규열은 장남으로서 가족들을 건사해야 했다. 그런데 새어머니 뱃속에선 동생이 자라고 있었다. 피난을 갈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여동생을 낳았다. 먹을 게 없었던 어머닌 퉁퉁 부어 누워만 있었다. 젖을 달라고 우는 동생을 바라보며 자신도 주린 배를 움켜졌던 규열은 자신도 모르게 평생 못 잊을 행동을 하게 된다.

▲ 2014년에는 조선일보가 주최하는 사회공로부문 청롱봉사상을 수상했다.
# 남의 집 담장 넘어 밥을 훔치다

남의 집 담장을 넘었다. 주인 몰래 가마솥에 있는 밥 한 사발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오랫동안 굶은 상태에서 훔쳐 먹는 게 들킬까봐 손으로 밥을 퍼 먹은 8살 규열은 일어설 수 없었다. 급히 너무 많이 먹은 탓이었다. 그 때 생각했다. ‘쌀 한 항아리만 있으면…’

가난과 전쟁 통에 여동생마저 굶어죽고 세월은 흘렀다. 공부에 한이 맺혔던 아버지는 어려운 형편에도 규열을 학교에 보냈다. 인근에 있는 백봉초교 1회 졸업생이 됐다. 한 해를 거르고 중학교를 진학해 2학년 겨울방학이 됐을 때, 몸져누운 새어머니 뿐만 아니라 아버지마저 병석에 눕게 됐다. 더 이상 학업을 이어갈 수 없었다.

때 마침 고안리 아곡저수지 조성공사가 시작된다는 소릴 들었다. 일품을 팔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공사현장에서 지게질도 하고 어깨가 부서지도록 나무를 베어 날랐다. 얼추 200여 짐을 했을까. 나무 판 돈과 품삯을 모으니 송아지 한 마리를 살 수 있었다.

“송아지가 가산을 일으키는데 종자가 됐지. 어쩜 그리 빨리 크던지, 송아지 크는 걸 보는 재미로 살았어요.” 19살이 되던 해, 잘 키운 소를 팔아 땅 세마지기를 샀다. 그때부터 기울었던 살림은 서서히 피기 시작했다. 23살에 한 살 어린 아내 박이순을 만나 결혼했다. 슬하에 1남 3녀가 생겼다.

자식들은 하교 후 농사를 도와야 했다. 넉넉지 않은 형편 때문에 자식들 공부도 제대로 시키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수십 년 세월이 흘러가고 마침내 스물네 마지기 논을 마련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인생의 새로운 운명을 만났다. 

“우연히 길에서 중학교 동창을 만났어요. 나한테 장학회 한 번 했으면 하는데 가입하라는거여. 나는 공부를 못했고 내 자식들은 장학금을 못 받아봤지만 장학금을 내고 싶더라구. 가슴이 뛰었지요.”

▲ 2011년 칠순이 되던해. 백암면사무소에서 김종역 면장, 유정배 회장 등이 참께 한 가운데 장학기금 5000만원을 전달했다.

# 친구의 권유로 장학회를 만나다

집에 와 아내와 상의했다. “여보! 나는 가난 때문에 공부를 못한 게 철전지원이오. 장학금을 좀 내고 싶은데 당신 생각은 어때요?” 쌀 열가마니를 내놓겠다는 갑작스러운 얘기에 놀란 아내는 펄쩍 뛰었다. 약 50만원 돈이었고 시골 농사꾼에겐 당시로선 꽤 큰 거였다. 결국 허락을 받아 장학기금으로 내놓은 것을 시작으로 20여년간 줄곧 기부운동은 지속됐다.

2011년이 됐다. 칠순을 맞는 해였다. 환갑잔치도 못했고 평생 남하고 술 한잔 제대로 나누질 못 했으니 잔치를 벌일 면이 서질 않았다. 아내에게 말했다. “남들한테 부조를 받아야 하는데 못할 노릇이네. 칠순 잔치할 돈으로 우리 한번 가장 멋지게 써봅시다.” 아내에게 “칠순이니 7000만원을 장학금으로 내 놓겠다”고 말했다. 엄청난 액수에 아내는 반대했다. 이때부터 규열은 일도 안하고 드러누웠다.

투쟁(?) 며칠만에 허락 받은 금액은 5000만원. 이 돈은 2011년 1월 백암면장학회에 기탁했다. 그는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장학금을 기탁한 오늘이 내 생애 가장 행복한 날입니다.”

배움의 시기에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포기했던 황규열. 앞으론 내 고향에서 이런 학생들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1남 3녀를 모두 출가시키고 아내와 단란하게 살고 있는 그가 말한다. “사람은 배울 때와 일할 때, 돈을 벌 때와 돈을 써야 할 때가 있어요. 도울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지난 날 고생이 모두 달게 느껴집니다.” 

 # 5년 농사를 더 지어야 하는 이유

그의 장학금 기탁운동은 백암지역을 넘어 용인사회까지 관심을 넓혔다. 5000만원 기부에 이어 용인시민장학회에 1500만원을 내 놓았다. 다음 해 아내 칠순을 맞아 면사무소를 찾았다. 쌀 100포대를 기부했다. 그리곤 말했다. “내 아내 칠순 멋지게 해 준거죠, 하하.” 굶주림과 못 배운 설움이 한이 됐던 그는 기부를 하며 더 값진 삶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말한다.

“내 소원은 평생 쌀 한 항이라를 놓고 먹고 사는 거였죠. 이제는 집에 쌓여 있는 쌀 한 항아리의 소원을 이뤘어요. 돈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많이 쌓아놓고 죽으면 뭘 합니까? 아프면 병원 갈 돈, 죽으면 장례 치를 돈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앞으로도 쌀 한 항아리가 넘는 양만큼 내 고향 용인에서 봉사하며  살겠습니다.”

75세의 나이에도 농사일을 놓지 않고 있는 황규열 어른. 그는 80세까지 일하겠다는 각오다. 직접 농사 지은 쌀 기부 30년을 꼭 채우고 싶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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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어른 소릴 듣는 거 쉽지 않은 길이죠” 
 
황규열씨는 요즘 불려 다니는 곳이 많다. 중앙공무원 연수는 물론 이런저런 자리에서 강연을 한다. 스스로는 “생각이 짧아 늘 고민이고 말 할 기회가 부담스럽다”고 하지만 듣는 이들은 큰 감동을 받는다. 살아온 인생 속에서 소재를 찾고 이타적 삶이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항상 고향과 지역사회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그에게 ‘지역공동체’란 어떤 의미일까, 어른의 역할은 무엇인지 물었다.  

-그간 기부와 봉사는 고향인 백암과 용인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특별한 이유라도…
“내가 살아온 터전이 백암이고 용인이다. 15대째 살고 있다. 다 조상들의 음덕으로 이 만큼 살림살이를 유지한다. 어려울 때 누가 날 도왔나? 이웃이다. 이웃과 지역이 잘 돼야 내 자손들도 번성할 것 아닌가.”

- 용인시민신문에서 펼치는 캠페인 ‘따뜻한 동행, 상생공동체 용인’을 어떻게 생각하나.
“좀 어려운 말이긴 한데, 결국 우리끼리 잘 먹고 잘살자는 것 아닌가. 늘 내 주위부터 잘 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우리끼리 뭉쳐야 한다고 본다. 어딜 나가든 용인에 대해 안 좋은 얘길 들으면 맘이 상한다. 나 하나의 행동도 그래서 중요하다.”

-용인이 어떻게 해야 발전할지…
“상부상조다. 용인만큼 큰 고장이 없다고 들었다. 농촌과 도시가 있고 공장도 많고 그래서 일자리가 많아지면 잘 살게 되는 거 아닌가. 내가 지역인재 육성을 부르짖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따라 배울 지역어른이 없다’는 얘길 주위에서 종종 듣는다.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 사회가 나만 아는 쪽으로 흐르다보니 그런 듯하다. 어른 노릇 힘들다. 그래도 어른대접 받을려면 그만큼 노력해야 하고 모범을 보여야 한다. 정치했던 사람들을 포함해서다. 존경받는 어른이 있는 동네와 그렇지 못한 곳과는 미래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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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방송공사(KBS) 프로그램 '강연 100℃'에 출연 당시 영상화면 갈무리
나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

규열이 너는 1942년에 세상에 태어나 7살 때 어머니 여의고 참으로 가난하게 살았구나.
얼마나 배가 고프던지 남에 집에 담을 넘어 밥을 훔쳐 먹으며 또한 어린동생 두 명이나 굶어죽는 것을 보며 무엇을 배웠느냐.

중학교 2학년 때 중퇴하고 농사일을 시작하여 나무장사 품팔이하며 송아지 한 마리로 살림을 늘렸구나. 참으로 장하다. 23살 때 결혼하여 1남 3녀를 두어 공부시키며 땅도 사가며 사는 동안 네 아내를 엄청나게 고생시키며 살았구나.

너는 무엇으로 아내에게 보상하며 살겠느냐. 1991년부터 쌀 10가마니로 장학금을 내기 시작하여 25년간 7000만원을 냈으니 공부 못한 설움을 그렇게 달랬구나. 또한 배고파 쌀 한 항아리를 담아 놓고 사는 것이 평생 소원이라 한 것을 2015년까지 쌀 400포대나 불우이웃돕기를 하였으니 네 배고픈 설움을 이렇게 달랬구나.

너는 참으로 인생을 멋지게 살고 있구나! 네 나이 75세라며 너는 이렇게 말했지. “아프면 병원에 갈 돈만 있으면 되고 죽으면 장사 치룰 돈만 있으면 되지, 돈이 무엇이 그리 중요하냐. 죽을 때 싸가지도 못할 돈” 이라고.

이제 너는 사는 동안 쌀 한 항아리가 넘는 것 만큼 네 고향 용인과 네 이웃을 생각하며 살기를 바란다. 부디 죽을 때까지 멋지게 살거라. 너는 가난한 농부지만 마음은 용인에서 제일 부자라고 말했지. 75년 동안 참으로 수고 많이 했구나!       

                                                             2016년 새 아침에 황규열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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