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통소 소장

세상은 수로 이뤄져 있다. 하나의 개별이 하나의 성격을 갖고 분리돼 다시 조합되는 세상. 그게 수의 세상이다. 그런 수를 인간만이 자연에서 발견했고 수의 개념을 통해 자연을 분해하고 재조립하는 창조의 삶을 누리게 됐다.

타로는 수비학(數秘學)을 기초로 한다. 0부터 9까지 열 개의 숫자가 삶의 신비를 품고 있고, 그 수를 알게 됨으로써 인간의 삶을 설명할 수 있다는 사상에서 시작됐다. 현재 많이 활용되고 있는 성격유형론 중에 하나인 에니어그램도 그런 수비학의 전통을 응용한 것이다.

수비학은 수의학(數意學)과 같다. 숫자 하나는 일반 단어의 개념처럼 의미와 기운을 갖는다. 한 개, 두 개, 세 개…. 그렇게 더 많은 숫자를 만날 때마다 우리의 감각은 달라지고 그것을 대하는 행동도 달라진다.

기원전 3000년경에 나타난 초기문명의 수메르 인들은 60진법을 사용했는데, 60진법은 자연현상을 크게 나누기 좋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이렇듯 숫자는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세상을 풀어가는 지혜를 제공했던 것이다.

‘13일 날 태어났어요. 혹은 26일 생이네요’라는 것만 가지고도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참 신기하다. 1과 3 그리고 더해서 4가 된다는 것만 알아도 그들이 얼마나 개인 중심적인 삶을 사는지 금방 알게 된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숫자에는 반드시 성격이 있고 의미가 존재한다.

하나는 ‘우연’이니 ‘멋대로’ 이다. 둘은 언제나 소통을 원한다. 그래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성질이 생긴다. 셋이 되면 최초의 ‘완성이 되어 뭉친다’. 혹은 그것으로 만족하고 더 이상 확장하려고 하지 않는 ‘독립적’인 성격이 만들어진다.

그런 식으로 10개의 숫자는 개별 성격을 가지고 분해되고 합치면서 의미의 변화와 방향성을 갖게 되는데 그것을 연구한 학문이 수비학이다.

지난 호에 0을 의미하는 메이저타로의 바보카드 이야기를 쓰면서, 왜 0이 바보인지 설명 못하고 넘어갔다. 0은 없는 것이 아니라 있지만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쓰고 있긴 하지만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성질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0의 의미는 ‘세상’이 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0인데, 1로 드러나지 않는 한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0은 우리들이 숨 쉬는 공기와 같아서, 반드시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 것과 같다.

0과 10, 100, 1000, 10000, 100000, 1000000과 같이 0이 늘어날수록 우리의 머리는 복잡해지고 더 똑똑한 정신을 필요로 한다. 세상이 커지는 것이다. 한 달에 백만 원을 받는 직장인과 일억을 버는 CEO는 사고하고 행동하는 패턴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0은 바보고 10은 자신의 세상을 갖는 것이고, 100은 서로 함께 사는 세상을 만나는 것이다. 1000이 되면 우주를 만나고, 10000이 되면 역사를 만난다. 0은 뱃속의 태아다.

또 다른 0은 아직 만나지 못한 세상이며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은 0을 만나기를 바라며 더 큰 세상을 느끼면서 살고 싶어 한다.

더 많은 연봉, 관계, 생각을 갖기 위해 다들 열심히 살아간다. 그것이 인간만이 느끼고 누릴 수 있는 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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