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하나에도 이름과 전설

80년대로 넘어가던 고등학교 시절, 학생군사훈련의 일환인 행군 겸 소풍으로 간 곳이 터어
키 참전비였다. 구 영동고속도로 마성 간이역 부근에서 쉬어가곤 했는데 그 밑으로 펼쳐지는 너른 벌판을 끼고 평화롭고 안락해 보이던 마을 모습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바로 마성리 마가실이었다. 서쪽으론 석성산 자락을 깔고 앉고 북쪽으론 할미성(노고산성, 마고성)이 감싸고 있다.

마을에 이르는 길은 남쪽으로 나있다. 앞곶이(전대리)에서 영문리를 거쳐 끝말로 통하는 곳과 옛길을 확장해 새로 만든 것이다. 각각 뒷길, 큰길로 칭하고 이를 ‘쌍갈래길’로 불렀다. 순흥 안씨가 처음 입향해 능성 구씨와 의성 김씨와 함께 살아가다가 훗날 전주이씨(全州 李氏)가 들어오면서 현재 대성을 이루고 있다.

가운데말을 중심으로 남서쪽엔 건너말, 윗말, 양지말, 끝말로 이어져 있다. 마을 자체가 용인
의 중심을 이루는 큰산을 끼고 있어 골짜기가 많다. 서쪽에서부터 묘안, 농바위골, 진득말, 후채골, 양푼골, 잣고개, 학당곡(학등이), 삼밭골, 정개무골, 말도둑골, 쪽주골, 구름물골, 중고개 등이다.

묘안이란 곳은 전주이씨 종중산인데 안막산이란 지명에서 보듯 순흥 안씨의 터전에서 역사적 환경 변화에 따라 혈족간의 이동을 확인해 주는 지명이기도 하다. 농바위골은 장롱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가까이 있는 함바위 역시 모양새에서 연유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삼국시대 그 이전 마을형성

그러면 이 마을의 기원은 어느 시대로까지 거슬러 내려갈까. 할미성 축성시기와 연계해 삼국시대 이전으로 추정 가능하다. 할미성을 중심으로 맞대고 있는 구성면 동백리쪽은 석재가 없는 반면 잣고개 넘어 마가실은 흔하디 흔한 것이 돌이다. 뿐만 아니라 축성용 석재가 마을에 산재한 것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전문가들이 할미성(노고산성, 마고성, 마성)은 보개산성(석성산)보다 오래된 삼국시대 이전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춰 그렇다. 그러나 마가실은 그 훨씬 이전, 선사시대의 주거지로 ‘용인지역 중심지가 아니었나’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이전에 서너집이 주거지로 삼았던 양지말에는 돌무더기군이 있다. 그 중 거지바위 옆에 있었던 하나는 잘 보존된 고인
돌로 추정된다. 마름모꼴 평바위로 남동면이 290㎝이고 나머지 면도 2.5m∼3m다. 두께는 85㎝ 가량이 되는데 크고 넓직한 덮개돌 밑에는 굄돌로 보이는 1.5m정도의 석재와 잔돌이 두툼하게 깔려 있어 보존상태가 대단히 양호한 편이다.

동네 어른들에 따르면 누구도 손을 댄 적이 없다고 한다.이 마을은 70년대 이후 에버랜드가 인근에 터를 잡으면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살아오고 있다. 때론 갈등적 요소도 없지 않았는데 그 중 하나가 수많은 바위를 훼손하거나 에버랜드를 꾸미는데 가져다 사용한 점이다. 뒤에 다시 밝히겠지만 돌은 이 마을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어 더욱 아쉬움을 준다.

함바위 역시 정으로 깨어져 이름과 함께 사라질 뻔했으나 마을 어른들의 강력한 반발로 살아남아 있다.기괴한 모양새는 이름과 함께 전설까지 만들어냈다. 부잣집 처녀와 가난한 집 총각 사이의 이루어지 질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하다 결국 서로 마주보고 바위로 굳어버렸다는 ‘짝바위’전설도 그중 하나다.

마가실이란 지명유래와도 연관돼 있지만 곳곳에 있는 흔적과 전설은 마을과 할미성이 밀접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정개무골은 할미성을 쌓을 당시 중간 목에 모아 두었다가 다시 옮기는 선처짐을 하던 곳이란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또 계곡물이 저수지를 거쳐 마을로 통하는 길목에 ‘할미통수 바위’라는 거대한 암석을 있는데 이 곳에서 마고선인(麻姑仙人)이 할미성을 축성하기 위해 돌을 나르다 통곡을 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역시 ‘할미’라는 말이 들어간다.

이 마을의 기원과 생명력을 이어주는 것은 역시 할미성이란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할미성 전설을 용인의 기원신화로 역사적 사실로서의 할미성, 그리고 마고선인에 대한 전설이 뒤얽혀 신비스럽기까지 한 마가실. 문득 이 두 가지가 어울려 빚어내는 할미성 전설은 용인의 ‘기원신화’로 까지 승화시킬 수 있는 소재로 충분하지 않은가 하는 다소 엉뚱한 생각에 이르렀다.

‘신화’하면 요즘 누구누구의 성공신화가 떠오르지만 인간사회 어디에서건 수 천년이 지나도록 그 생명력을 유지하는 신화가 있다. 민족(건국)신화다. 선조들의 삶으로부터 녹아 전해져 우리 삶 속에 살아 숨쉬고 있는 신화. 이것이 그처럼 생활과 정신세계 속에 살아 유지하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모든 공동체와 종족, 민족들에게 정체성을 심어주는 기능을 하는 까닭이 아닐까 싶다.

즉, 각각의 집단을 결합시키고 것이다.마찬가지다. 지역사회도 그 탄생의 유례를 신화에 의해 설명하고 흩어진 지역정서를 단단히 연결하는 구심역할을 할 수 있는 신화는 과연 불가능할까? 바로 할미성을 중심으로 한 마고선인 전설을 단순한 허구로서의 신화가 아닌 역사 속에 살아있는 신화로서 복원이 가능하리란 생각이다.

더구나 고인돌로 추정되는 괴석과 연결 지어 볼 때 그 가설은 더욱 설득력을 얻어 갈 수 있을 것도 같다. 요즘들어 고인돌을 단군조선의 유적으로 보아야한다는 주장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반도 전역에 수 만기 산재해 있는‘고인돌(支石墓)’주인공은 ‘단군조선’의 유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다수의 고고학자들조차 한반도 고인돌 문화는 동아시아 거석문화권의 중심권이라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기왕이면 마가실과 할미성을 연계해 용인의 탄생신화를 창조하고 여기에 석성산(보개산성)까지 포함하는 고대문화 유적벨트로 만든다는 것이 허튼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하 이 일대를 용인의 지리적, 문화적, 정신적 중심지로 복원함이 어떻겠는가. 요즘들어 더 간절한 이유는 왜일까.

우상표 기자 spwoo21@yongin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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