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의원의 옷차림이 온 나라를 흔들어놓았다. 예의가 없느니, 국회를 모독했느니 하면서 흥분하는 대단히 예의바른(?) 의원님들의 모습이 TV를 장식했다. ‘양복’을 차려입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소위 정장을 입지 않고 면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나온 것은 국회와 국민을 무시하는 것이라는 논리다.

우리 땅에서 ‘양복(洋服)’이란 말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95년이었다. 이 때부터 외국 복제가 공인되었던 것이다. 양복을 입는 일이 세간의 관심이 된 것은 이보다 조금 앞선 1881년에 일본으로 파견되었던 신사유람단이 요코하마(橫濱)양복점에서 양복을 맞춰 입었던 일로부터 시작됐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설립된 양복점은 하마다((濱田)양복점이었다. 이 양복점은 1889년에 지금의 광화문우체국 근처에서 개업하였다. 이 양복점은 주로 일본공사관과 일본 군대를 상대로 영업을 하다가 1895년에 양복이 공인되자 궁중에까지 납품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1903년경에 한흥양복점이 최초로 개설됐고 그 후 서울에 많은 양복점들이 개설됐다. 이 시기에 개설되어 지금까지 영업을 하고 있는 유일한 양복점이 ‘종로양복점’이다. 1916년에 개업한 이 양복점은 창업주 이두용(李斗鎔, 1882∼1942) 씨가 일본의 동경양복학교에서 기술을 배워와 보신각 옆에서 점포를 열었다. 지금도 종로 1가에 채 10평도 안 되는 가게지만 오랜 전통을 자랑하며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1930년대가 되면 서울에만 400여 개의 양복점이 개업을 하고 있을 정도로 발전했지만 1930년대 말부터는 전시통제로 명맥만을 유지하는 상황까지 내몰리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은 해방 이후에 외국에서 생활하다가 귀국한 동포들에 의해 미국이나 유럽식의 양복이 국내에 선보이기 시작하면서 극복되었다.

해방 직후에 ‘마카오 신사’라는 말이 유행되기도 하였다. 이 말은 마카오로부터 들여온 영국산 원단으로 양복을 해 입은 멋쟁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렇게 원단을 해외에 의지하던 상황은 한국전쟁 이후 경남모직과 제일모직에서 국산 복지를 내놓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지금은 기성복의 위세에 눌려 있지만 아직도 ‘K-앙고라텍스’니 ‘골덴텍스’니 하는 양복지를 선택하고 상의의 뒤트임, 소매단추 등의 개수를 알려주고 사나흘 후에 양복점에 가서 가봉(시침바느질)을 하고 또 사나흘 뒤에 가서야 비로소 양복을 입을 수 있었던 때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정치인들 10명 중에서 3, 4명이 찾는 것으로 알려진 'J라사'에서 주로 판매하는 양복은 보통 150∼200만원 정도라고 알려지고 있다. 고급 맞춤 양복점들이 몰려있는 소공동의 양복점들에서는 양복을 해 입을 수 있는 ‘양복표’도 발행하고 있으며 직접 집을 방문해 치수를 재는 등의 특별서비스도 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보통 ‘시민’이야 그런 곳을 쉽사리 다닐 수 있겠는가? 그러니 ‘마카오 신사(紳士)’처럼 차려 입은 비싼 정장을 ‘전투복’삼아 수시로 벌어지는 갖은 저질 개인기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번 일은 그저 또 한번의 웃음거리일 수밖에. 국회에는 멋쟁이 ‘신사’보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임무를 성실히 하는 ‘시민’이 더 필요하지 않겠는가.
글/서문석·강남대 강사

<경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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