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구 향토사학자

▲ 사간공 신호 묘 전경

평산을 본관으로 삼은 사연

어느 날 고려 태조 왕건이 제장들을 거느리고 황해도 평산을 지날 때 마침 기러기 세 마리가 고공을 날고 있었다 한다.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고 왕건이 “누가 저 기러기를 잡겠느냐” 하니 숭겸이 “제가 잡아보겠습니다” 했다.

왕건이 “그러면 자네가 잡아보게” 하니 신숭겸이 왕건에게 말하기를 “몇 번째 놈 어디를 쏘아 잡을 까요” 물으니 왕건은 “세 번째 놈 왼쪽 날개를 맞혀 보라” 했다.

이내 숭겸이 활시위를 당기니 세 번째 기러기가 왼쪽 날개를 맞고 떨어졌다 한다. 이에 탄복한 왕건은 숭겸에게 평산 땅 300결과 함께 신씨라는 성을 하사했다 한다. 이로 인해 후손들은 평산에 거주하게 됐고 평산을 본관지로 삼았다 한다. 평산은 현재 황해도에 있는 지명을 말한다.

평산 신씨 시조인 신숭겸은 복지겸, 홍유, 배현경과 함께 왕건을 추대해 고려를 건국한 원훈이다. 927년 후삼국 통일을 위해 고려군과 후백제군이 대구에서 전투를 벌일 때, 고려군이 견훤군에게 포위돼 패색이 짙어지자 왕건과 용모가 비슷한 신숭겸이 왕건을 피신시키고 자신이 왕건인양 어거를 타고 전쟁하다 전사한 고려 충신이다.

이를 슬프게 생각한 왕건은 숭겸을 춘천에 예장하고 ‘장절(將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현재 장절공의 위패는 고려 충신을 배향한 연천에 숭의전, 고려태조 묘정, 춘천의 도포서원, 곡성 덕양사(德陽祠) 등에 배향돼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에 향사를 모신다.

가문을 빛낸 평산인들

▲ 장절공 신숭겸 영정
고려조에 명문 거족의 발판을 이룬 평산인들은 조선조에 들어와 묘정(왕의 신위를 모신 곳)에 배향 인물 신개를 비롯한 4명, 상신으로 신흠을 비롯해 8명, 그리고 대제학 2명, 판서 14명, 한성판윤 4명, 공신 11명, 문과급제자 186명을 배출한 명문거족의 반열에 올랐다.

평산의 후예들은 평산 신씨 명현열전에 의하면 조선 초기 즉, 시조로부터 14세에 이르러 19개 파계를 이뤘는데 이중 문희공파, 정언공파, 사간공파가 주를 이루고 있다. 문희공과 정언공은 형제이며 사간공과는 28촌간이다. 용인에 거주하고 있는 평산 신씨는 주로 사간공파에 속한다.

‘문희공파’의 파조는 신개(1374~1446, 호는 인재)로 세종조에 좌의정을 역임한 인물이다. 시호가 문희임으로 후손들을 문희공파라 일컫는다. 문희공의 증손 신상은 중종조에 판서를 역임 했는데, 당시 남곤을 비롯한 훈구세력과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세력 간에 첨예한 대립이 있을 때 중간에서 화합을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그의 손자는 임진왜란 때 명장으로 이름난 충장공 신립(1546-1592)이다.

신립 장군의 아들 경진, 경유, 경인 3형제는 모두 무과출신으로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모두 정사공신이 됐다. 특히 충익공 신경진(575~1643)은 병자호란 때 명장으로서 인조 때 영의정에 올랐다. 조선조에서 영의정은 주로 문과 출신이었는데 무과출신으로 영의정에 오른 사람은 신경진과 순천 박씨 박원종 두 사람뿐이다. 문희공파는 후손에서만 장신 14명을 배출, 무인 가문임을 자랑하고 있다.

정언공파의 파조 신효(1381~1461, 호는 서산인)는 태종대왕 때 대과에 장원해 벼슬길에 올랐으나 그는 올곧은 성품으로 왕에게 직언하다 파직돼 행주에서 평생을 보낸 인물이다. 문희공 신개의 친동생이다.

‘문정공파’의 대표적 인물로 신흠(1566~1628, 호는 상촌, 시호는 문정)이 있다. 공은 인조 때 영의정을 역임했으며 이정구, 장유, 이식과 함께 조선 4대 문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아우 감은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조선왕조실록 복간에 공이 컸고, 흠의 아들 문충공 신익성은 인조 때 병자척화 5적신으로 심양에 잡혀가 그의 충정을 후세에 전했다.

익성의 아우 익전은 김상헌의 문인으로 당대에 유명한 학자였다. 그밖에 숙종조에 명신 문숙공 신정은 익전의 아들이고, 고종조에 문경공 신응조는 좌의정을 지내고 봉조하(종2품)에 이르렀다. 그 외 평산 신씨를 빛낸 인물을 찾아보면 우선 우리나라 여성의 롤모델로 추앙받는 신사임당을 들 수 있다.

사임당(1504~1551)은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 잘 알려져 있지만, 화가로서도 유명하다. 특히 현모양처로 만인의 표상으로 추앙받을 정도로 현재 5만원권 지폐에 그의 초상이 실려 있다.

조선 후기 신재효(1812~1884)는 판소리의 이론가이며 후원자로 우리나라 판소리를 집대성했다. 그의 제자로 여류명창인 진채선, 허금파 등을 길러내어 우리나라 판소리를 전승, 발전시키는데 기여했다.

독립의병운동에 기여한 인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에 분개해 영남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의 간담을 서늘케 한 신돌석, 단양에서 의병활동을 한 신태식,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역임하며 독립군 사령관으로 널리 알려진 신팔균, 감리교 목사로서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신석구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한 가문이다.

용인의 평산 후예들

▲ 숭의전 전경

용인의 평산 신씨는 주로 사간공파이며 사간공은 시조로부터 14세가 된다. 사간공 호(?~1432)는 한림을 지낸 혼의 맏아들이다. 사간공이 고려 말 공양왕의 지신사(정삼품)로 있을 때 공양왕이 이 태조에게 선위하는 일이 벌어졌다.

왕으로부터 옥쇄를 전달하라는 명을 받고 이 태조에게 옥쇄를 전달할 때, 이를 주지 않으려고 들고만 있자 태조의 휘하가 뺏으려 함에 공은 분함을 못 이겨 옥쇄를 내 던짐에 옥쇄가 깨지게 된 일이 벌어졌다.

이를 본 왕이 “과연 호는 내 신하로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러한 사실은 포은의 죽음으로서 충절, 야은의 은거로서 충절과 다를 바 없는 충절의 표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선생의 이러한 충절을 기리기 위해 돌아가신 후 ‘사간(思簡)’을 시호로 하사받았으며 이후 후손들을 ‘사간공파’로 하게 됐다.

사간공의 후예들 중 저명인사를 보면 임진왜란 때 명의 구원군 파병에 공을 세워 선무공신이 된 신점이 있고, 호조판서를 역임하고 영중추부사(정1품)에 오른 신사철이 있다. 사철의 아들 만(1703~1765), 회(1706~?) 형제가 영의정을 역임했다.

조선시대 형제 영의정은 안동 김씨 김수홍·김수황 형제와 후대에 와서 안동 김씨 세도정치 때 김병학·김병국 형제가 있고, 평산 신씨 만·희 두형제가 있을 뿐이다. 근세 인물로 고종 때 참정대신을 지낸 신기선, 독립운동가이며 국회의장을 역임한 해공 신익희 선생이 있다.

용인의 평산 신씨는 최근 외지에서 유입한 집도 있다. 그러나 과거로부터 세거해온 지역은 처인구 양지·백암·이동면 천리 등지에 있으나 주로 원삼면 두창리와 좌항리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이들이 좌항리에 집성촌을 이루기 시작한 것은 200여년 전 여주에서 양지와 원삼 좌항리로 이주한 것에서 비롯됐다 한다. 1950년대 좌항리에 평산 신씨는 60여 호의 집성촌을 이뤘으나 지금은 사회의 변화로 10여 호만 선영을 지키고 있다.

이곳 평산인들 중 사회에 기여한 인물을 보면 원삼면장을 역임하고 현 좌항초등학교 설립 당시 교지를 기부해 초등교육 발전에 기여한 신용철과 그의 5촌 신현대가 있다.

국회의장을 역임하고 대통령에 출마했던 신익희 선생을 보필하고 경기일보 회장을 역임한 신선철, 경기 일원에 이름 있는 건설회사인 한동건설 사장인 신항철, 원삼면장을 역임한 신응철, 용인새마을 운동협의회 1대 회장을 역임하고 용인시 산림조합장을 역임한 신효철 등이 있다.

이동면 천리의 평산인들 중 유명인사로 태성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한 신현정, 자유당시절 용인군 국회의원을 역임한 신의식 의원이 있다. 좌항리의 신효철은 1970년대 말 용인 평산 신씨 ‘화수회’를 조직해 선열들의 얼을 기리며 친족간에 우의를 도모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현재 이들은 매년 10월과 11월 각 지역시제에 참석해 숭조사상을 기리고 있으며 연 2회 용인 평산 신씨들이 모여 친목을 도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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