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의병에서 망명 독립투쟁까지… 50년 반세기 이어진 처절한 가족사

 

▲ 여성독립군 출신 오희옥 지사가 지난 18일 자택에서 20여년 전 3대 독립운동 가문 관련 특집기사를 꺼내 다시 읽어보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의해 국토가 유린당하는 통한의 역사를 가진 우리지만 분연히 일어나 항거했던 많은 애국지사들이 있었다.

이 가운데 용인에서 태어나 3대에 걸친 빛나는 항일투쟁에 나선 사람들도 있다. 근·현대사에서 보기 드믄 사례로 손꼽히는 이들이 바로 ‘오인수 일가’다.

먼저 구한말 경기 일원에서 의병투쟁에 앞장섰던 오인수 의병장이 그 1대요, 만주를 주요 무대로  해외 항일운동과 건군과정에도 참여한 오광선 장군과 만주의 어머니 정정산 여사가 2대다.

또 중국에서 태어나 아버지에 이어 항일운동을 했던 오희영·오희옥 자매와 큰 사위 신송식 참령이 그 3대다.
반세기 동안 3대에 걸친 6명 지사의 삶과 활동을 만나본다.


1대 오인수 의병장(1867∼1935)
경기남부 주름잡던 의병장…중국 망명지서 눈 감아

 
원삼면 죽능리 어현(느리재) 829번지에서 오태한과 김규일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병자호란 때 척화파로서 끝끝내 항쟁을 주장하다 심양에 끌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3학사의 한 분인 추담 오달재의 후손이기도 하다.

명포수로 이름이 높았던 오인수 의병장은 1905년 한일늑약이 체결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경기도에서 궐기한 의병장과 정원욱과 함께 주력 부대장인 중군장으로서 용인, 안성, 죽산, 이천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또 같은 시기에 활동 중이던 의병장 정철화 의병장과 합세해 혁혁한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죽능리 어동 고향에서 일진회장 송병준의 아들인 송종헌의 토벌대에 의해 잡혀가 10년 징역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중 감형을 거쳐 6년의 징역살이를 마치고 출옥했다. 중국으로 건너간 그는 1935년 10월 67세의 일기로 낯선 이국 땅에서 눈을 감았다.

2대 오광선 장군(1896∼1967)
신흥무관학교 교관 거쳐 광복군 국내지대 사령관 역임

 

의병장 오인수와 이남천 사이에서 4남매 중 맏이로 태어난 오광선 장군은 본명이 성묵으로 21세 되던 1915년 광복 투쟁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보정군관학교를 거쳐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한 그는 졸업 후 교관으로 근무했다.

일본군의 대거 침공으로 북간도가 유린당하고 무장단체들이 근거지를 떠나 홍범도 장군의 정일군, 조동식 장군의 광복단, 김혁선생의 흥업단 등이 백하구로 집결해 통합해 만든 ‘대한독립군단’을 편성했을 때 그는 간부를 맡았다.

노령인 자유시 흑해사변 당시 구사일생으로 탈출하기도 한 그는 1930년 7월 한국독립당 의용군에서 총사령관 이청천 장군과 함께 주요 간부로 활동했다. 임시정부 김구주석의 일본관동군 사령관에 대한 암살지령을 받고 북경으로 건너가 공작준비 중 옆구리에 총을 맞고 잡혀 옥에 갇히고 만다.

그는 당시 오원지라는 가명을 쓰고 있던 관계로 3년형을 받았다. 해방이 되자 그는 단신 귀국해 하지중장과 담판, 비행기를 타고 중국에 건너가 김구 주석과 이청천 장군 등을 모시고 귀국했다.

그는 광복군을 대한민국 정규군으로 키우기 위해 광복군 국내지대 사령관을 맡았으나 미군정의 반대로 무산되고 임정과 광복군이 배제된 국방경비대가 창설되자 이를 반대하다

1946년 광복청년회를 만들었다. 결국 광복군을 기축으로 한 건군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대립만 할 수 없어 국군에 투신, 육군 대령에 임명돼 지구병사구 사령관 등을 역임하고 육군 준장으로 예편했다. 1961년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된 그는 1967년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셋방에서 타계했다.

2대 정정산(정현숙, 1900~1992)
광복군 따라 대륙 유랑 30년…‘만주의 어머니’로 불려

 

오광선 장군의 아내로 이동면 화산리 요산골이 고향이다. 여준의 고향이기도 하다.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시봉산 고개 넘어 원삼 죽능리 출신 오광선과의 혼인으로 고난의 길로 접어든다.

만주에서 산을 개간해 농사를 지으며 독립군에게 밥을 지어 먹이고 3남매를 비롯한 시부모 등 가족들의 생계를 실질적으로 도맡았다. 이때 얻은 별명은 ‘만주의 어머니’였다. 오희옥 선생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정정산 독립지사를 ‘여장군’이라고도 불렀다 한다.

독립군의 뒷바라지와 비밀 연락임무를 수행하면서 한국혁명여성동맹에도 가담했다. 1944년에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당원으로 활동하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도 헌신했다. 
 

3대 오희영(1924∼1969)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 광복군 제3지대 초모공작대 활동

 

1924년 중국 길림성 액목현(현재 길림성 교하현)에서 오광선과 정정산 여사 사이에 맏딸로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 아버지 오광선은 검성학교 체육교관으로 있었다. 검성학교는 여준이 신흥무관학교를 교하로 옮겨 세운 학교다. 16~7세 소녀 오희영은 1939년 경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들어가 활동했다.

이 조직은 중국 청년들과 함께 광복군 활동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극장에서 연극 공연을 하거나 가두 선전공작 등을 수행했다. 1940년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여군으로 입대했다. 광복군 제3지대 간부로서 초모공작대 초모공작위원으로 활동했다.

초모공작은 일본군 내부에 침투해 방송을 하거나 전단 등을 배포해 탈출을 유도하는 선무 공작의 하나다. 1942년에는 김학규 제3지대장의 인솔 하에 일군의 점령지대를 돌파해 남편 신송식 등과 함께 중국군 유격대가 자리잡고 있던 부양(阜陽)에서 초모공작분처를 설치하고 첩보활동을 전개했다. 후일엔 한국애국부인회, 44년에는 한국독립당 활동으로 이어졌다.

중경 임시정부에서 신송식과 결혼해 임시정부 선전활동에 종사했다. 항일무장 투쟁을 주도한 오광선 장군의 투쟁을 계승해 장녀 오희영은 한국광복군의 당당한 여군으로 활동함으로써 보기 드문 항일투사 가족의 면모와 3대가 이어지는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신송식 (1914∼1972, 오희옥의 남편)
중국군 장교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활약한 광복군 참령

 

신송식(1914∼1972)은 1936년 중국 중앙육군국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독립당 재건을 위해 활동했다. 1937년 4월부터 중국 중앙포병 51사단 소위로 임명되어 항일전쟁에 참전했다. 1941년엔 민족혁명당원으로서 조선의용군에 가입했다가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전입돼 서안에서 활동했다.  

1942년에는 김학규 제3지대장의 인솔 하에 일군의 점령지대를 돌파해 중국군 유격대가 자리잡고 있던 부양(阜陽)에서 초모공작분처를 설치하고 첩보활동을 전개했다.

중국사관학교를 거쳐 중국군 장교출신으로 중일전쟁에 참전한 바 있는 그는 3지대 김학규 대장 휘하에서 교관으로 활동했다. 그는 그 곳에서 훈련을 받던 여성 독립군 오희영을 만나 결혼으로 이어졌다. 1945년 6월에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령으로 복무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있는 오광선, 정정산 부부(사진 왼쪽)와 신송식, 오희영 부부의 묘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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