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황씨의 근원

우리나라 황씨는 160여 본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평해, 장수, 창원, 상주 항주 등 10여 본이 황씨의 주를 이루고 있다. 여러 본의 황씨들의 도시조는 황락이라 하며 황락은 중국 후한의 유신이었다 한다.

황락과 구대림(평해 구씨의 시조)이 함께 후한에서 지금의 베트남지역에 사신으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평해(平海)에 안착해 살았다 하며 이때가 서기 28년 신라 유리왕 5년이다.
 

서천동 직산공 시제 모습

표류해 온 황락이 평해에 살게 됨으로써 사람들은 황락을 황장군이라 불렀다고 하며 그가 우리나라 황씨의 시원이라 한다.

지금도 경북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에 황장군의 유적이 전해지고 있어 황씨 문중에서 제단을 설립하고 조상의 얼을 기리고 있다. 함께 정착한 구대림이 살던 곳을 구미진이라 하며 구대림은 평해 구씨의 도시조로 모시고 있다.

황장군의 후손들 중 갑고, 을고, 병고 삼형제가 있었는데 갑고는 기성군(기성은 평해의 옛 이름), 을고는 장수군, 병고는 창원백에 봉해져 훗날 평해, 장수, 창원 황씨의 시조가 됐다 한다. 현재 모든 황씨들 중 항주 황씨(중국 귀화 성씨)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황씨들은 황락을 도시조로 하며 평해, 장수, 창원 황씨로부터 분적해 수십여 본의 황씨를 이뤄 계대를 이어오고 있다.

여러 본의 황씨 중 상주 황씨는 황락의 후손인 황석주를 시조로 하고 있다. 시조인 석주공은 고려 때 사람으로 나라에 공을 세운 이에게 주는 호칭인 상주국에 봉해진 인물이다.

그의 4세손인 을구공이 소윤(한성부, 개성부의 정4품 관직)을 역임하고 상주에 정착하면서 후손들은 본관을 상주로 하게 됐다 한다. 본관지인 상주는 경상북도 내륙에 있는 도시로 과거 경상도에서 큰 도시였으며 경상도라는 도 이름 역시 상주의 상자와 경주의 경자를 합해 만들어진 이름이다.

 

고려에서 기틀 마련, 조선 초에 꽃 피워

 

▲ 여주에 있는 양평묘.


고려조에서 상주국에 이른 석주공이 상주 황문을 열고 2세인 진경공이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아갔다. 3세 자신은 삼중대광(종1품)에 이르고 4세 을구공이 소윤(정4품)을 역임하면서 상주 황문 기틀을 잡기 시작했다. 6세인 사간(1396-1416)공은 뜻이 곧고 명석해 정인지 등과 과거에 합격해 승문원정자(정9품)를 역임했으나 21세의 나이로 요절함에 그 뜻을 펴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사간의 아들인 황효원(1414-1481, 호 소원, 시호 양평)은 과거에 장원하고 관계에 진출해 각조의 정랑(정5품) 충청·강원관찰사, 대제학을 역임해 상주 황문을 명가문으로 널리 알리기 시작했다.

양평공 황효원은 벼슬이 우참찬(의정부 정2품)에 이르렀고 숭정대부(종1품의 품계), 상산군, 봉조하(전직 고위관원에게 직무 없이 녹봉을 지급하는 예우직) 칭호를 받은 인물이다. 묘소는 수원시 이의동(1970년대까지 용인군 수지면 이의리)에 있다가 광교신도시 개발로 여주로 이전했다

공은 불천지위(不遷之位: 영원히 기제사를 모시는 인물)에 올라 양평묘(襄平廟: 공의 제사를 모시는 사당)가 서천동에 있었는데, 현재 여주로 옮겨 매년 9월이면 종인들이 모여 기제사를 올리고 있다. 상주 황문은 양평공 효원의 아들 대에 와서 대종파, 차종파, 직산공파로 나뉘어 가문을 이어오고 있다.

 

 

 

▲ 여주 북내면에 잇는 중시조 양평공 신도비.

 


대종파(대호군파)의 파조는 대호군(종3품)을 역임하고 이조판서에 증직된 8세손 양평공의 장자 석경(1429~1490)이다. 둘째 아들 준경은 절충장군(정3품) 첨지중추부사, 선산부사를 역임하였고 차종파(중추공파)의 파조가 된다. 현재 상주 황씨 후손들 중 가장 번성한 파이기도 하다. 셋째 아들 윤충은 직산부사를 역임해 직산공파 파조이며 공의 후손들이 용인 인근에 거주해 용인파라고도 불린다.

이와 같이 번성해 온 상주 황문은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3명, 청백리 1명, 무과 급제자 다수, 그리고 장신 2명을 배출했다. 이는 인구수에 비해 많은 인물을 배출한 명문가문임을 말해주고 있다. 2000년 인구통계에 의하면 상주 황씨는 총 2173가구에 7031명으로 기록된 것으로 봐서 인구비로 적은 성씨에 속한다.

 

 

용인의 상주 황씨 후손들

용인의 황씨 집성촌으로 백암면 고안리 일원에 장수 황씨가 집성촌을 이뤘으며 상주 황씨는 기흥구 서천동 일원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입향조는 상주 황씨의 중시조인 상산군 황효원이 셋째 아들인 직산공 윤충과 함께 내서천(안서그네)에 이주하면서 세거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로 미뤄 용인의 상주 황문은 600여년 전부터 세거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도 내서천에 상산군이 식재했다는 향나무가 있어 시 보호림으로 보호되고 있다.

용인의 상주 황문은 대종파, 차종파 직산공파 세 파 중 셋째 파인 직산공파이며 직산공파 후예들은 주로 용인에 거주하기 때문에 용인파라고도 불린다.

직산공파의 파조인 윤충공은 효원의 셋째 아들로 직산현감(종6품)을 역임하고 통훈대부(정3품)에 증직된 분이다. 상산군 황효원이 퇴임 후 셋째 아들인 직산공과 용인시 기흥구 서천동(안서그네)에 이거해 살게되면서 서천리를 중심으로 상주 황씨 직산공파 세거지가 되었다.

직산공 이후 관직을 보면 9세손이며 직산공의 아들인 기좌는 한성부 주부(종6품)를 역임하고 노비를 관장하던 장례원 판결사(정3품 관직)에 증직됐다. 10세손 세현은 참봉을 지내고 승정원 사승지에, 11세 잠은 호조참판에 증직됐다.
 

▲ 중시조 양평공이 심은 향나무(기흥구 서천동 소재).

이같이 문인관직으로 이어오던 용인 상주 황문은 12세에 들어와 중남이 비록 예우직이기는 하나 동지중추부사(종2품)를 역임하고, 유신(1613-1714)이 군사조직인 5위에 정4품 관직이며 선략장군으로 호칭되는 부호군 벼슬을 했다.

유신공의 큰 아들 14세 수민(1653~1727)공은 무과에 급제해 부사과를 역임하고 승정원 좌승지에 증직됐다. 서천동의 직산공파 후손들 중 14세 수민의 후손들을 직산공파의 수민공계라 불린다. 수민공의 후손 15세 두기는 무과에 급제하고 호조참판에 증직됐고 16세 도윤은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했다.

또 13세 유신의 둘째 아들 부민(1656~?)공은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을 역임했고 그의 후손들을 직산공파의 부민공계라 불린다. 13세 유신의 셋째 아들 수연(1668-1753)공은 무과에 급제하고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했으며 한성부좌윤에 증직됐다.

수연의 후예들을 직산공파의 수연공계라 부른다. 이와 같이 직산공파 후예들은 서천동을 중심으로 여러 관직을 거치며 수민공계, 부민공계, 수연공계로 분류돼 계대를 이어가고 있다.

이 세계통의 후예들은 종친회를 조직해 조상의 유훈 전승은 물론 총친 간 친목을 도모하고 있다. 직산공파 후손들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서천동 일원(화성시 발원동, 수원시 망포동 포함)에 70~80여 호가 거주했다 한다. 현재에도 도시화에도 불구하고 20여 호가 거주해 동족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은 1990년대 이후 서부 용인이 개발됨에 따라 수용되거나 도로로 편입됨에 따라 수원시 이의동(1970년대 용인 땅이었음)에 있던 중시조인 양평공 황효원의 묘를 여주로 이장하고 서천동에 있던 직산공 후손들 중 수민공계의 묘는 백암으로, 부민공계는 안성으로, 수연공계는 여주로 이장해 묘원을 조성해 조상을 기리고 있다.

아울러 이장 후 여력 있는 자금으로 종친회 종재를 마련해 그 수입금으로 각종 장학사업과 복지사업을 실시해 타 문중에 부러움을 사고 있다 한다. 매년 10월이면 선조의 시제를 올리며 선조에 대한 숭조정신을 기리고 종인들의 친목을 도모하고 있다.

직산공 후손들은 각종 직업에 종사하고 있으나 특히, 학계에 진출해 이공계 박사 학위 취득자가 8명, 인문계 취득자가 3명에 이른다. 상주 황문의 유적으로 남사면 완장리 매능동에 열녀 정문이 전해진다.

그 내막은 상주 황문 대종파의 후손이며 14세인 황탁의 딸이 의성인 김치복의 아들과 혼인을 약속했는데 혼인하기 전 신랑 김수로가 사망했음에도 시댁을 찿아가 삼년상을 치르고 자결을 했다 한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열녀로 칭송해 나라에서 상을 주는 시대였다. 이러한 황씨의 행동은 국가로부터 열녀상인 열녀문을 받아 그 열녀정문이 처인구 남사면 완장리 매능동에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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