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국무총리 비서실장 목성표 (1919-1968)

 

누군들 한 사람의 삶은 시대와 밀착돼 있다. 따라서 인물을 통해 그 시대를 읽게 된다. 여기 한 사람이 있다. 목성표(睦聖表, 1919~1968) 선생이다.

그는 건국 후 초대 국무총리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용인지역에서 몇 차례 국회의원 출마 경력도 있다. 그래서 지역 원로들에겐 그리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하지만 지명도에도 불구하고 거의 드러나지 않았던 삶이 있다. 일제강점기 조국해방을 위한 헌신 과정이다. 용인은 경북안동 못지않은 독립운동의 성지라 할 수 있다.

많은 애국지사는 물론이요 의사(義士)와 열사(烈士)를 배출한 대표적인 고장이다. 무력투쟁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110년 전 자결로서 세계만방에 조선의 자주국임을 처음 선언한 국은 이한응 열사와 같은 이들도 있다.    

그러나 지난한 항일 투쟁과정은 직업적 운동가만으론 불가능하다. 전선과 후방이 구분되기 어렵고 전투와 생존을 위한 일상의 삶이 뒤섞인 가운데 조국해방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긴호흡으로 뚜벅뚜벅 걸었던 많은 선각자들이 있었다. 목성표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 청운의 꿈을 품고 만주로 떠난 시골출신 수재

독립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던 1919년 기미년, 아명이 진국(鎭國)이었던 목성표는 처인구 이동면 덕성리 삼배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목영균이며 어머니는 조태형으로, 사천목씨 가문은 대대로 그 마을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였지만 비교적 유복한 가정환경이었다. 어린 성표는 명석하고 공부를 잘 했다. 어린시절 공주를 거쳐 서울 아현동에 정착한 후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했다. 이어 그는 서울법대의 전신이랄 수 있는 3년제 경성법정학교 법학과에 들어가 학생회장으로 활동하는 등 매사 왕성하고 적극적인 활동력을 보여준다.

중견 법률인을 양성했던 관립 전문학교였던 만큼 그에겐 졸업 후 뜻을 펼칠 기회는 많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나라 밖이었다. 식민지 조국을 떠나 민주로 향한 그는 재만조선인사정연구소(在滿朝鮮人事情硏究所)를 개설해 만주에 있는 조선인들의 연감을 발행하는 등 정착인들이 필요한 사업을 펼쳤다.

중국으로 아예 망명한 목성표 선생은 북경을 중심으로 한 화북중 각지를 돌며 하남성개봉한북교민회 부회장을 맡는다. 당시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가 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하고 정훈처장까지 승진 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런점에서 이미 망명 교민사회와 독립운동진영 내에 은밀한 역할을 바탕으로 깊은 신뢰와 입지를 짐작할 뿐이다. 

 

▲ 용인출신 대학생 모임인 용문회 고문자격으로 참석해 찍은 기념사진(앞줄 왼쪽 두번째. 1959년 모습)


# 철기 이범석장군의 최측근 보좌역을 맡다

 용인 3대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오광선의 초명이 ‘성묵’이었던 것처럼, 해외 독립운동에 나선 이들은 대개 신분을 숨기기 위해 개명을 했다. ‘진국’에서 ‘성표’가 된 것도 1941년 이후 망명시절인 것으로 보인다. 이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규군이자 최정예부대로 이름을 떨치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 창설 시점이다. 지휘관은 철기 이범석(1900~1972)장군이었다.

1920년 김좌진장군과 함께 청산리전투의 영웅이었던 이범석과 용인출신 목성표가 어떤 인연으로 가장 가까운 관계로 발전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드물게 당시를 기억하는 독립투사들을 통해 추측할 뿐이다.

한국광복군 제2지대 출신으로 거의 유일한 생존자이자 대한광복회 부회장을 역임한 김유길(94) 선생은 둘의 관계를 이렇게 회고한다. “해방 전후해 이범석 지대장께서 서안쪽으로 자주 전방시찰을 나갔다. 확군사업의 일환으로 국내정진군이라 하여 당시 일본군 소속 한국군들을 모아 귀국하려는 작전이었다. 당시 정확한 지명은 기억나지 않으나 이범석장군 옆에 목성표 선생이 있었다.”

한국광복군 제2지대가 더욱 유명한 것은 중국주재 미군사령부와 합동으로 국내 상륙을 위한 OSS훈련을 받는 등 최정예 부대라는 점이다. 또 해방 직후 이범석 장군의 지휘아래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직접 부대원들이 비행기로 여의도에 착륙하는 등 무력투쟁을 통한 자주독립 쟁취 입장을 상징했다.

당시 목성표 선생은 OSS훈련에는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해방 전 어떻게 광복군에 있었는지는 알수 없으나, 명석하고 사업도 잘했으며 물심양면으로 이범석 장군을 도와 큰 힘이 되었던 사람이었다.” 역시 김유길 전 대한광복회 부회장의 회고다.  

 

▲ 앞줄 왼쪽 세번째가 목성표 선생. 해방직전 재중국한국광복군 한교선무공작대 간부시절로 보인다.


# 건국 후 초대 국무총리 비서실장으로  

마침내 조국은 다시 빛을 보게 됐다. 하지만 광복이 되고도 곧바로 귀국할 수 없었다.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으려했던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에 의해 1년이 지나서야 이범석 장군과 함께 그리운 조국의 땅을 밟을 수 있었다.  

1946년 2월 입국 후 그는 청년운동과 함께 사업을 했다. 철기 이범석 장군이 주도한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은 1948년 당시 전 인구의 6%인 120만명에 달할 정도로 엄청난 조직력을 과시했다. 목성표 선생은 아마도 그 일에 관여하면서 한편으론 조직의 물질적 기반과 철기장군의 정무 보좌 일을 병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양무역회사 부사장과 구미무역공사 및 오아실무사 사장으로 왕성한 경제활동을 펼쳤다.

주로 운송업, 출판업, 곡물상을 운영하는 한편 해외무역까지 넘나드는 사업이었다. 그러나 그 일은 오래가지 못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동시에 이범석 장군은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에 임명됐고, 목성표 선생은 곧바로 그의 비서실장으로 불려갔기 때문이다.

1947년 조선민족청년당(족청) 총본부 여성부 조직위원 출신으로 20대 보사부장관을 역임한 김정례 여사는 “국무총리 비서실은 주로 조선민족청년단 소속인사들로 구성돼 있었다.

목성표 비서실장은 이범석장군의 신뢰가 돈독했다. 과거 활동이 가려져 있었던 그에 대해 물어보니, ‘중국에서부터 내내 같이 일해 온 동지이며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이범석 장군이) 말씀하시더라. 내가 기억하는 그는 작고 다부진 키에 매우 똑똑했고 강직했다. 총리 보좌관으로서 충성을 다하고 총리의 청렴한 성격에 해가지 않게 대처했던 인물이었다”고 회고했다.  

▲ 뒷면 자필-독립을 쟁취하자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 정국의 한 복판에서 펼치지 못한 꿈

 목성표 선생은 1950년 3월 돌연 국무총리 비서실장 겸 국무회의 서기장 자리에서 사임한다. 추측컨대 정계입문을 위한 수순으로 보인다. 전쟁 직전인 5.30일은 2대 국회의원 선거일이었다.

당시 유기수·목성표·정기섭·구철회·신용철·민경식·장기용·최인술이 출마했는데, 유기수가 당선되고 그는 차석으로 석패했다. 이후 3대와 5대에도 출마했으나 정치적 꿈을 이루진 못했다. 하지만 용인출신 대학생 모임인 ‘용문회’ 고문을 맡는가 하면 대동신문사(한국경제신문 전신) 사장을 역임하는 등 지역사회와 중앙무대에서 다양하고 왕성한 활동을 펼쳐나갔다.

해방전후에 독립운동가이자 실업인이며 지식인으로 살았던 목성표 선생. 그는 정부 수립 이후엔 4.19 민주혁명 정신을 추앙하고 부정과 부패를 뿌리뽑고자 하는 민족주의자이며 민주주의자였다. 비록 49세라는 길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불꽃처럼 한 시대에 밀착해 치열하게 살았던 선각자였다.  

 

▲ 고향인 처인구 이동면 덕성리에 있는 목성표 선생 묘소

<목성표 선생이 살아온 길>

 •처인구 이동면 덕성리에서 출생
•선린상업학교 졸업
•경성법정학교 법과 졸업(학생회회장으로 활동)
•만주에 이주 재만조선인사정 연구소 개설,
   재만 조선인 연감 발행
•중국으로 망명, 화북중각지전전순방
•하남성개봉한국교민회 부회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광복군 제2지대 입대,
   정훈처장까지 승진
•재중국 한국 광복군 한교선무 공작대간부
•독립일보사 창설/사장
•한국 광복군내 정진군 총사령 부관
•조국 해방 1년 후 귀국
•청년운동(조선민족청년당 활동으로 사료됨)
•삼양무역주식회사 부사장


•대한민국 수립과 동시 초대 국무총리 비서실장겸  국무회의서기장
•태양신문사 중역
•제 2·3·5대 국회의원 출마
•대동신문사(한국경제신문 전신) 사장
•정치문제 연구소 대표

<인터뷰 내용과 주요자료는 그의 2남 6녀 중 막내아들 목상호(미국명 Martin Sangho Mok)와 며느리 권경(미국명 Karen Kyong Mok)으로부터 제공받았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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