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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면 덕성리에 집성촌 이룬 진주 소씨
  • 이종구 향토사학자
  • 승인 2015.04.27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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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인구 이동면 덕성리 삼배울에 있는 진주 소씨 묘역.

우리나라의 소씨

소씨는 우리로 표현할 때 소(邵)자를 쓰는 성씨와 소(蘇)자를 쓰는 두 성씨가  있다. 소(邵)씨는 고려 명종(1170-1197)조 때 경상도 안찰사를 역임한 소광빈을 시조로 하는데 본관은 평산이며 2000년 인구통계에 의하면 725명뿐인 희성으로 용인에는 집성촌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번에 살펴보고자 하는 성씨는 진주 소씨(晋州蘇氏)로 족보상 연원을 보면 고대 중국의 요, 순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며 후손 가운데 한 줄기가 한반도로 들어와 우리나라 소씨가 됐다고 한다.

이후 세월이 흘러 경주 인근에서 6부 촌장들이 박혁거세를 추대해 신라를 건국할 때 촌장가운데 한 사람이 소벌도리인데 진주 소씨의 상계 조상이라고 진주 소씨 족보에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상계를 족보상 기록한 것은 진주 소씨가 뿌리가 깊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일반적으로 신라가 삼국통일 할 때 공이 큰 소알천으로부터 계대를 헤아리고 있어 시조를 소알천으로 하고 있다.

소씨는 진주가 단본으로 2000년도 통계 조사에 의하면 약 4만 여명에 이르고 있으며 우리나라 성씨 순위 69번째에 자리하고 있다.

진주 소씨의 연원과 본관지

   
춘곡 선생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자식들이 이동면 덕성리에 세운 노래비.


얼마 전 TV 드라마 ‘선덕여왕’이 절찬리에 방영됐다. 극중 인물 가운데 화랑을 이끄는 알천(소경으로 개명)이라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바로 진주 소씨의 시조가 된다. 시조인 소알천은 선덕여왕(632-647)을 보필해 큰 공적을 남겼으며 다음 왕인 진덕여왕 때 상대등(신라 최고관직)에 올라 화백회의의 의장을 역임했다. 진덕여왕 사후 여러 신하들이 알천공을 왕으로 추대했으나 나이가 많고, 김춘추의 지혜로움과 덕망을 들어 김춘추에게 양보했는데 김춘추가 바로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신라 29대 태종 무열왕(재위 654-661)이다.

이로 미뤄 알천공의 혜안과 국량을 알 수 있으며 무열왕은 소알천에 대한 감사 표시로 알천의 조상인 소벌도리를 문열왕으로 추존했다고 한다. 시조 소알천은 나이가 들어도 손자가 없어 걱정하던 어느 날 꿈에 조상인 소벌도리가 나타나 “네가 도사곡(지금의 진주시 상대동)로 옮겨 살면 반드시 아홉 장군을 얻으리라” 해서 진주로 옮겼는데 현몽대로 손자를 보게 됐다고 한다.

알천공은 기쁜 나머지 자신의 이름 알천을 경사로울 경(慶)자를 써서 소경이라 개명했다고 하는데, 시조 이름으로 소알천보다 소경이라는 이름이 더 알려져 있다.

소경이 진주로 이거해 손자를 보고 후손들이 번창하니 후손들은 진주를 본관으로 삼게 됐다. 또 현몽대로 3세인 손자 복서로부터 11세인 격달까지 9명의 장군을 배출하니 신라의 큰 명문가로 비상하게 된다. 특히 격달은 고려 왕건을 도와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기여한 바 커서 대장군에 올라 진주 소씨가 고려시대 명문가문으로 등장하는 확고한 기틀을 마련했다.

본관지 진주는 본디 백제의 거열성으로 신라의 영토가 된 뒤 거열주라 불리다가 757년(경덕왕 16년) 9주 5소경 실시와 함께 강주가 된다. 고려태조 23년(940년) 처음으로 진주로 개칭됐으며 983년에 전국 12목 중 하나인 진주목으로 변경돼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게 된다. 이후 여러 차례 바뀌어 오던 끝에 1949년 진주시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상대동은 상대등 벼슬을 한 소경이 살던 곳이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조선 중기 화려하게 발돋움

신라시대 소억자를 비롯한 9장군, 소희영을 비롯한 8시중(장관직), 소후준을 비롯한 7총관(신라시대 군지휘관)을 배출해 신라의 명문가로 이름을 올렸다. 하동태수였던 11세 소격달(891-983)이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우고 삼한벽상공신에 올라 고려조에 진주 소씨 번성의 기틀을 마련했다.

14세손 소현이 이부상서를 역임했고, 22세손 소함은 좌우위상장군에 이르고 1254년 몽골의 침입으로 진위전투에서 순절한 충신이다. 이로 인해 진위 여좌동 일원을 사패지로 받아 진위에 진주 소씨 집성촌을 이루게 된다. 특히 15세손이며 소현의 아들인 소계령(시호 문간)은 이부상서를 역임하고 1094년 헌종(1094-1095)이 즉위하자 국구(왕의 장인을 호칭)가 돼 진산부원군에 봉해졌다. 딸이 현종비인 희순황후이다.

소을경은 문과에 급제해 개성윤, 판도판서를 역임했으며 청백리로 당대에 존경을 받았다. 그의 아들 소천은 정몽주의 문인으로 문과에 장원했으나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자 전주로 낙향해 은거했고, 그의 형 담은 고려가 망함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해서 진위(지금의 평택시)로 낙향해 후세교육에 전념했다. 담은 곧 용인 소씨의 선조가 된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 진주 소문은 9시중, 7상서, 판관, 판서, 부원군 등을 배출해 명실공이 삼한갑족으로 명성을 얻게 됐다.

조선 초에는 불사이군 정신으로 소문의 관계 진출은 미비했으나 성종조에 29세 소효식이 한성부 판관(종 5품))을 지냈고 소자파, 소기파, 소계파 등의 세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현달했다.

큰아들 자파는 사직서령, 의빈부도사를 역임했고, 둘째 기파는 삼포왜란 때 왜적을 토벌해 그 공으로 전라도 좌수사,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셋째 계파는 무과에 급제해 도사를 역임했다. 효식의 아들 3형제가 현달하고 손자 13명이 모두 출세해 소세량은 곤암공파, 소세양은 양곡공파 등 31세에서 여러 파로 분파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잘 알려진 인물로 소세양(1486-1562)은 1509년 식년문과에 급제해 수찬직에 있을 때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복위를 건의해 현릉에 이장케 하고 사가독서를 거처 좌찬성(종일품)을 역임했다. 소세량(1476-1528)은 생원시를 거처 명유들과 교류하면서 사서삼경은 물론 소설, 불경 등 외우지 못하는 것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며 대사간(정3품)에 오른 인물이다.

진주 소문은 조선조에서 문과급제자 12명, 대제학 1명을 배출해 고려시대보다는 화려하지 않으나 인구 수에 비해 명문거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용인의 진주 소씨

   
1968년 소영규·이조천 부부의 회혼식 행렬 모습. 24년 후 아들 소진혁·김규기 부부도 회혼례를 올렸다.


용인에서 진주 소씨 집성촌으로는 처인구 이동면 덕성리가 유일하다. 이동면 덕성리에 진주 소씨가 세거하게 된 연유는 33세인 소인혜(1559-1636)가 임진왜란 때 용인 인근에서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우고 절충장군(정3품 당상관) 충추부사를 지냈는데, 그의 충절을 높이 산 조정으로부터 덕성리 인근을 사패지로 하사받아 후손들이 살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소인혜 후손들의 이력을 보면 아들 소정이 성균관 진사를 역임했고, 아들 운한이 승사랑이 됐다. 특히 둘째 아들 운핵은 생원으로서 나주목사 소원주와 함께 진주 소씨 족보인 경술보(1670년)를 간행해 진주 소문의 시원을 밝히기도 했다.

후손들은 2000년대 들어 덕성리 인근에 산재한 선조 묘들을 한곳에 모아 납골당을 조성하고 조상의 유훈을 기리고 있다. 이 납골당은 아주 후미진 곳이라 해서 나라에서도 땅 주인을 알기 어려운 곳이라는 의미의 ‘나라모랭이’라 불리던 곳에 묘원을 조성했다. 묘원 이름도 거창한 이름이 아니라 골짜기 이름을 빌어 한자화 해 ‘국부지원(國不知苑)’이라 했다.

후손들 중 자랑거리로 한집안 부자가 회혼례를 올리는 경사가 있었다. ‘회혼례’란 혼인한지 60년이 되고 자녀들 중 한명이라도 먼저 죽은 이가 없는 경우에 자손들이 주선해 치르는 혼례잔치를 말한다. 옛날에는 평균수명이 짧아 결혼 60주년은 매우 드물었는데 부자 부부가 회혼례를 지낸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회혼례를 치른 집안은 대추댁(원곡 대추내에서 시집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의 소영규·이조천 부부가 1968년 회혼례를 올렸고, 그의 아들 소진혁·김규기 부부가 1992년 회혼례를 올려 인근에 화제가 됐다. 소진혁은 자신이 평소 경험한 것들을 글로 써 자신의 호인 춘곡을 빌어 ‘춘곡집’을 펴내고 마을 주민들의 단합을 위해 마을 애향가를 작시했다. 춘곡 선생이 돌아가신 후 아들들이 모여 2012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마을 정자 앞에 노래비를 세워 인근 주민들의 부러움을 샀다.

뿐만 아니라 덕성리의 진주 소씨 대부분은 장수집안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집안 내력에 장수 인자가 있기도 하겠지만 나름대로 안분지족의 정신을 지키면서 근면성실하게 생활하는 것에 더 큰 이유가 있다고 생각된다. 1970년대만 해도 덕성리에는 진주 소씨들이 20여 호 이상 살고 있었으나 현재는 7집이 선산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매년 음력 10월 초하루가 되면 입향조 묘소에서 30여명의 후손들이 모여 시향을 올리며 후손들 간에 친목을 도모하고 조상의 유훈을 기리고 있다.

이곳 출신 진주 소씨 인물로는 소진태가 이동면장을 역임했으며 치과의사, 변호사, 수의학박사, 생명공학박사, 약학박사 등을 배출했다. 군인으로 소오영이 현역 대령으로 근무 중에 있다. 불과 몇 집 안 되는 집안에서 이룬 학문적 성취는 매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소운영은 조상들의 음덕을 연구, 정리해 후손들에게 알리며 후손들의 친목과 마을 발전에 노력하고 있다.

이종구 향토사학자  이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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