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현면 능원리 산 5번지에 위치한 포은 정몽주 선생의 유택을 찾는 내외 참배객의 발길은 사철 끊이지 않고 있다.

예로부터 많은 후학들이 선생의 사상을 추앙하였고 조선시대 역대 임금들이 선생의 충의 정신을 표장(表奬)하였으며 사문의 사표로서 추앙되어 왔다.

포은 선생의 충의정신은 사후에도 변함이 없어 조선조에서 추증한 직함을 새긴 묘비석이 깨져, 고려시대의 직명으로 다시 세웠다는 기록이 택리지에 전한다.

이를 보면 <공민왕 때 재상된 신하로서 홀로 태조께 붙지 않았으므로 태조의 제장들이 조영규를 시켜 다리(선죽교)위에서 쇠뭉치로 때려 죽여 고려가 드디어 망해 버렸다. 후에 본조(조선)에서 본조의 직함 ‘의정부 영의정’을 추증하고, 용인 묘전에 비석을 세웠더니 곧 우뢰가 내려 비를 깨쳐 버렸다. 정씨 자손들이 고려 문하 시중의 직명으로 고쳐 쓰기를 청하여 비를 세웠더니 지금껏 무사하다. 충혼의 백이 죽은 뒤에도 없어지지 않았음을 볼 수 있으니, 그 또한 두려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포은 선생 묘의 좌측에 서 있는 단갈이 바로 그것이라고 하는데 이 비는 중종 12년(1517)에 세운 것으로 비의 음기(陰記)에도 “벼슬은 고려의 직함을 쓰고 문충(文忠: 조선조에서 추증한 시호)이라 쓰지 않음은 두 성(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其書官緊以高麗不書 文忠公者 蓋明公不事 二姓文本意也-라고 기록되어 있다.

선생의 곧은 지조는 생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사후에도 더욱 들어나 충의백(忠義伯)의 정신은 만고에 우뚝함을 보여 주고 있다. /용인향토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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