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쓴 시인 홍사용.
1920년대 초, 낭만주의 운동의 선두에 섰던 그는 1900년 당시 용인시 기흥읍 농서리 용수골에서 남양 홍씨 철유(哲裕)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농사일을 하던 그의 부친이 대한민국 무관학교 1기생으로 뽑혀 서울로 올라가게 되자 태어난지 백일만에 서울 제동으로 이사하여 여덟살까지 살았다.

그후 한일합방이 되자 당시 친위대장으로 통정대부의 관직을 사퇴한 부친을 따라 낙향한 곳이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이었고 13세때 2년 연상인 원주 원씨와 결혼하였다.

한학을 수업한 뒤 1916년 휘문의숙에 입학하였으며 학창시절인 1918년 월탄, 정백등과 문학활동을 시작, 1919년 휘문의숙을 졸업한 뒤에 3.1독립만세운동때 앞장섰다가 체포되었으며, 그해 6월 향리로 내려간 다음 오로지 문학에 정진하여 백조(白潮)를 창간하였고 ‘토월회’에 참여하여 신극운동과 희곡 집필에 몰두하였다.

1922년 1월에 출간된 ‘백조’의 권두시 ‘백조는 흐르는데 별하나 나하나’를 비롯 그의 대표 시작(詩作)인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백조 3호에 게재되었던 것인데 이는 인도의 시성<타고르>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산문적인 시형(詩形)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그는 해방된 뒤 지병인 결핵으로 1947년 1월7일 48세를 일기로 하세하였는데 금년은 홍사용이 태어난지 1백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 시대를 살고 간 노작 홍사용은 한국 근대시 형성의 기틀을 마련한 뚜렷한 존재였던 서정시인임을 기억한다면 용인의 후손들이 기려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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