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사(府使) 황탁(黃鐸)의 딸 상주 황씨는 사주단자로 혼약을 맺었는데 불행하게도 그 남편 될 사람 통덕랑 김수로(金洙老)가 요절하고 말았다. 부음을 들은 황씨는 생전에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던 약혼자의 장례를 치르기 위하여 소복하고 삿갓 가마를 타고 시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황여인은 남편 상을 치르듯이 3년동안 삼시 상식을 올리고 곡을 하였으며 마지막 탈상 파제사를 지낸 후에는 젯상 다리에 목을 매어 자진하였다. 이와 같은 출중한 열행(烈行)이 나라님께 알려지자 열려 정문이 내려지니 순조 신묘년(1831)의 일이였으며 남사면 완장리 매능동에 그 정려각이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열려전의 한 대목이다. 이와 같은 윤리가 사회통념으로 선시대에 진보적인 인사가 용인에 있었다.

숙종 23년(1697), 6월9일 양지현에 사는 무인(武人) 김일성(金日成)이 상소하기를 “과거를 시행하되 다수를 뽑는 만과를 베풀고 곡식을 거두어 진제(賑濟)하는데 보충하고 부녀자들의 개가를 허락하여 우울한 마음을 통하게 하소서”라고 임금에게 청하였다.

나이 어린 청상과부의 수절이 얼마나 애처로운 일인지는 열려 황씨의 예에서 본바와 같으며 이와 같은 딱한 정상을 국법으로 완화시켜 청상과부들에게도 새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상소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내려진 비답(회신)은 “진달한 일이 한편으로는 사정에 어둡고 실정에 맞지 않으며 한편으로는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그의 민원은 각하되었다. 그러나 당시 사회의 고루한 도덕규범을 타파하고자 했던 그의 용기는 기록으로나마 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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