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3.1만세 운동이 시작되자 경기도내에서는 7일 시흥, 9일 인천, 10일 양평, 11일 진위, 14일 양주, 15일 가평, 21일 용인, 연천 31일, 이천 4월 1일, 여주 순으로 전개됨으로써 당시 경기 22개 부군(府郡)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나지 않은 곳은 거의 없었다.

3월 21일 원삼면에서 시작된 용인의 만세운동은 남녀노소는 물론 불교, 야소교, 천도교인 등 종교계에서도 적극 합류하였다.

이 운동은 3월 21일부터 4월 1일까지 용인 관내에서 모두 13회에 걸쳐 13,200명이 참가하였고 이중 왜경과 일본 헌병대에 의한 무력 진압 과정에서 사망 35명, 실종 139명, 상해 502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으며 주동자급 65명이 투옥되어 모두 741명이 희생되거나 투옥되었다.

당시 741명의 희생자가 발생되었다는 수치는 만세 운동 참여 인원의 5.6%에 해당하는데 인구 3만5천명을 5인가족으로 나누어 보면 7천세대가 된다.

그러므로 741명의 희생자가 전세대비 10.5%로써 적어도 10가구중 1명꼴로 사망했거나 실종, 부상, 투옥되었다는 얘기다 된다.

당시 경기도내에서는 1만5천명이라는 가장 많은 인원이 궐기했던 김포는 평야 곡창지대로서 인구가 많았기 때문이었다고 전제할 때, 가장 궁핍한 산촌에 불과했던 용인에서 도내 2위의 자리를 굳혔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로 이는 오직 뜨거운 애국심의 발로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지난 21일 양지면 평창리에서 용인시민신문 주관으로 열린 <3.21 독립만세 항쟁 추모 진혼제>가 이제는 용인시민의 애국정신을 이어가는 문화제전으로 격상 발전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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