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도둑님(?)들은 비록 남의 집 털이를 하더라도 다섯 계율을 지켰다.
첫째 훔칠만한 재물이 있는지를 탐지하고 성패여부를 판단하는 것을 지라하고, 둘째 맨 먼저 쳐들어 가는 것을 용이라하며, 셋째 빼앗되 죽이지는 않은다는 것을 인이라 하고, 넷째 맨 나중에 도망치는 것을 신이라하며, 다섯째 도둑질한 재물을 공평히 분배하는 것을 의라하였다.

도둑행각에 이 정도의 원칙을 존중하면서 가급적 부잣집이나 살림이 넉넉한 집만을 골라서 털고, 더러는 굶주리는 사람에게 동정도 베풀었다. 그래서 아무 원칙도 없이 마구잡이로 빼앗고 인명을 해치는 설익은 도둑은 날강도나 날도둑이라 했다는 말이다.
세종 29년(1550) 3월 6일 장단군의 고려 숙종묘인 영릉에 유기와 동기를 도난당한 사건이 일어나자 형조, 의금부, 한성은 물론 과천, 용인의 포졸까지 동원, 도둑체포작전을 벌인 일이 있었다.

왕릉의 제기를 훔친 이런 사건은 요즘 장관의 저택, 지사의 공관, 시장, 군수, 서장의 관사만을 전문으로 털어온 절도 사건과 맞먹는 파장을 불러 일으켰던 모양이다. 서민들은 도둑맞은 물건 하나라도 더 밝혀 찾으려고 한다는데 많이 훔쳤다는 도둑이 있는가 하면 도둑맞은게 없다고 잡아떼는 고관들이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본말이 전도된 희안한 사태가 아닐 수 없다. 파렴치한 도둑에 놀아나는 피해자, 이에 비하면 그래도 옛날 도둑들이 프로다웠다는 점이 요즘 도둑과 대비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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