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스타브 꾸르베(Gustave Courbet, 1819 - 1877) <돌을 깨는 사람>, 캔버스에 유채, 54.5x45cm, 1849년 제작, 개인소장

그림을 보자. 그림 속에는 단 두 사람이 등장한다. 한 사람이 돌을 깨고 있다. 아이는 온 몸으로 돌을 나른다. 노동은 언제나 고통을 수반하고 육체의 한계에서 늘 힘겹다. 먼 옛날부터 이런 노동을 두고 과연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선택도 없이 제 삶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묻고 있었다. 결론은 아니라고 답하는 것이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모든 것들을 두고 현자(들)는 ‘필연성에 종속되는 노예 같은 삶’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이 말은 곧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금과옥조와도 같은 변명거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자는 삶의 지혜를 통해 인간의 삶을 깊고 멀리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단순히 변명거리를 주고자 삶의 필연성을 폄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단 현자의 말을 따라가 보자.

육체를 구분하는 3가지

사람이 자신의 육체를 이용해 삶을 영위하는데, 그것을 구별해 노동하는 육체와 제작하는 육체 그리고 행위 하는 육체로 구분할 수 있다. 뭐, 이렇게 어렵고 복잡하게 구별하냐고 따진다면 차이를 설명함으로써 동의를 구할 수밖에 없다.

우선 노동은 앞서 말한 바 같이 고통을 수반하고 육체의 한계를 통해 구현하는 몸의 씀씀이다. 이에 비해 제작하는 육체는 무엇을 요긴한 것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을 감당하고 있는 상태를 설명하는 표현이다. 그리고 행위는 육체적으로 드러나지만 기실 몸과 정신이 하나가 되어 정신의 절대적인 지시를 잘 수행하고 있는 상태의 몸으로 이해되는 인간의 모든 것을 두고 일컫는다.

이제 구별이 된다면, 각자 자신의 몸 씀을 자세하게 들여다보자. 노동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그리고 극단적인 몸의 이용이다. 노동을 하지 않으면, 그게 내 몸이든 내 몸이 해야 할 일을 누군가가 대신해주든지, 생명은 생물학적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이 유지하는 방법이 오늘 노동에서 건강을 지키는 다양한 운동의 개념으로 바뀌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생명을 유지한다는 측면에서 서구 근대에 이르러 근면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은 몸의 사용 중 대단히 우월한 지위를 얻기까지 하였다.

이에 비해 제작함이라는 몸의 사용은 다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제작은 삶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삶을 윤택하게 만들고 사람이 좀 더 사람답게, 적어도 동물 수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차이를 만든다.

제작은 삶을 새롭게 바라보게 만들어 기술과 예술로까지 몸의 사용을 확장한다. 제작하는 몸은 아름다움이라는 용어를 빌려 몸의 단련을 중요한 수단과 방법으로 이해하게 한다. 많은 몸의 제작들은 이제 스포츠 스타들의 고된 극기로 치장되고 칭송되기도 한다. 제작의 몸 씀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삶에서 유용함을 보태는 극단까지 몸을 개방시키고 허용하기도 한다. 이것은 천재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또는 평범을 넘어서는 영역으로 미화되어 자신을 혹사시키며 우리는 사회적으로 정당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행위란? 사람은 먹고 입고 자고 쉬는 것만으로 살 수 없다. 사람은 단순히 돈만 벌어서, 먹는 것을 충족하고, 입는 것에 사치하고, 잠자는 것을 연장함으로 사람답게 살지 못한다. 사람은 언제나 지금보다 더 나은 쪽으로, 더 좋은 상태로 자신이 보존되기를 바라며 산다. 이것을 두고 사람은 불멸을 꿈꾼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불명성을 몸으로 감당하기 위하여 선택하는 몸의 사용이 바로 행위다. 몸보다 먼저 몸에 지시하고 있는 이 정신적인 사태를 두고 몸이 움직인다. 책을 읽는 것은 행위다. 음악을 감상하는 것은 행위다. 대화를 나누는 것은 행위다.

먼 미래를 꿈꾸며 자신의 오늘을 설계하고 계획하고 있는 바로, 지금 당신의 그 일은 행위일 수밖에 없다.

예술가 눈에 비친 사람다운 삶

서구 사회는 모던(근대)-새로움에 대한 끝없는 바람과 탐색을 정당화하고 정식화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두고 근대, 근대시기, 근대의 특징이라고 부른다. 이 근대를 통과하면서 노동과 제작 그리고 행위는 제 위치를 바꾸기도 하고 새롭게 해석되기도 하였다. 가장 극명한 가치를 뒤집고 있는 것이 바로 노동에 대한 평가다. 즉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위해 사람이 최소한 자신의 몸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가진 것이다. 이런 사고의 전환은 사회를 구성하는 계급에 대한 혁명적 이해를 가져서야 가능했다. 이제 노동은 자신을 자립하게 만드는 최소한의 덕목으로, 기초적인 조건으로 이해되었다. 언어(말)가 삶의 현장에서 재구성될 때, 노동은 그 현장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던 몸의 덕(탁월함)이었다.

구스타브 꾸르베는 이 탁월한 몸을 발견하고 그림으로 옮긴 작가다. 우리는 그를 사실주의에 입각한 대표적 작가라고 부른다. 사실주의란 있는 것을 그대로 묘사하는 그림의 양식을 표현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아니, 오리혀 사실주의란, ‘사실’이라고 부르는 것을 두고 예술사는 예술가의 신념체계를 설명하고자 했던 노력을 모아서 부르는 말로 이해한다.

꾸르베는 어떤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늘 탐색과 탐구로부터 ‘새로운 지경’을 발견하는 것을 근대의 특징으로 이해한다면, 사실주의에 입각한 예술가의 눈에 비친 사람의 사람답게 사는 삶이란 앞선 시대에 외면하고 있었던 은폐된 삶의 부분을 회복시켜 재해석하는 일로부터 증명될 것이었다. 노동은 그렇게 다시 읽혀지는 몸을 불러 왔다.

우리가 착각하고 의심하는 행위

사랑은 철저하게 온전한 행위이다. 사랑함은 행동으로 드러나지만 언제나 은폐되어질 때 비로소 사랑으로 보존된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사랑의 사랑함이라는 행위를 단순한 행동으로만 치부한다. 연인에게 편지, 반지, 이벤트를 통해서만 확인받고, 확인해주는 사랑의 행동은 인간의 본 모습을 영장류 수준으로, 동물수준으로 낮추어 놓는다.

하지만 그 행동으로부터 유발된 쾌를 마다하지 않으며 오히려 추종하는 우리는 지금 누구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제작함의 온전한 보존은 유용함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유용함이 곧 기능이라고 착각한다. 물길을 반듯하게 정비하는 것이 물의 기능적 이용이라고 믿는다. 그것이 더 큰 물의 유용함을 무시한 채-은폐시키지 못한 채-물의 기능을 단순화시켜 이해하는 결과다.

우리는 오늘, 경계를 두고 그 사이를 메꾸는 인간의 인간다움을 기다리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의 관계를 하나의 울타리로 나누고 지켜내면서, 법이라는 이름으로 그 울타리를 지키는데 급급하면서, 인간을 바라보는 깊은 눈을 상실했다.

당연히 행위는 행동 뒤에 감추어져 버리고, 행동으로 유발되는 값싼 경계의 공고함만을 지키려 한다.
대화라는 행위의 가장 인간다운 행위를 근간으로부터 의심한다. 기다림도 멈추고 겸양의 마음으로 간직하지 못한 채, 답변을 시간적으로 셈하면서 물리적이고 기능적으로만 기다릴 뿐이다. 그런 기다림은 행동이지 행위가 아니다. 엄마가 아이들에게 그 먼 인생을 어떤 마음으로 기다려 주던가?

꾸르베가 보여준 어린아이의 노동

꾸르베는 이런 노동에 대한 단순한 언어적 이해를 넘어서는, 행동 그 이상의 의미를 밝게 드러내고자 그림에서 두 사람을 등장시키며 이야기를 끌어간다.

주목할 등장인물은 바로 어린아이다. 그 아이는 온 몸으로 돌을 옮긴다. 온 몸이 감당하는 노동은 삶의 척박한 현장을 밝혀주고 있다. 간절한 삶의 보존이 요청되는 모습이다.

삶은 그런 간절함 위에서만 모든 것을 허용한다. 이 아이는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었을까? 화가의 눈에는 당시 사회가, 자본이 새로운 인간을 요구하던 시기에, 그 긴박함을 몸으로 감내하고 있던 사람의 사람다움을 어린 아이의 몸으로부터 발견한 듯하다.

이 두 사람은 얼굴이 없다. 익명이다. 더구나 아이는 우리 감상자에게서 몸을 돌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노동이 노동으로만 보이는 것은 노동이 은폐된 채 삶을 담보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엄마의 수고와 아빠의 고통 받는  몸뚱아리에 대해 일절 알지 못한 채 자라왔다. 어떤 부모가 아이에게 자신이 노동을 감추지 않고 까발리며 그 수고와 고통에 보답을 요구하는가?

노동은 그렇게 삶의 토대로서 제 역할을 제대로 언제나 수행했다. 다만, 이제 사 우리는 노동에 대하여 조금 더 알게 된 것 뿐이다. 그렇다고 제작이나 행위가 노동에 비해 위계가 떨어졌다는 말은 아니다. 차이는 차이로 잘 보존되고 있다.

저작권자 © 용인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