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너 해 전이었다. 양지일대에 많이 들어선 전원형 주택에는 의외로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젊은 세대가 많이 입주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됐다. 서울과 대도시에 직장을 두고 있는 그들이어서 불편한 점이 많을 것으로 생각돼 질문을 던졌다. 그 중엔 아이들 교육문제도 포함됐다.

“시골에 살자면 아이들 교육이 걱정되지 않나요?”“별로 걱정하지 않습니다. 인근에 용동중학교가 있잖아요.”그들의 대답은 생각 밖으로 간단하고 명쾌했다. 용동중학교가 ‘명문’으로 폭 넓게 알려져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괜찮은 중학교 하나가 있음으로 해서 그 파급효과가 여러모로 크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소위 일류대학 진학률뿐만 아니라 무용 등 예능 쪽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해 ‘조화로운 인간형성 교육의 전형’으로까지 일컬어지고 있는 학교. 특히 면 단위 소재 학교임에도 불구하고 도회지에서 입학을 위해 전입, ‘역류 현상’이 벌어지는 학교. 저명인사 배출은 물론 푸른 잔디운동장으로 상징되는 공원처럼 아름다운 학교.


특별한 각오가 필요한 용동중 교사

그러나 이처럼 명문의 전통을 쌓아오기까지 그 중심에 선 이가 있다. 바로 김이진 전 교장선생님이다. 1962년 교장으로 부임해 1998년 3월까지 36년간을 재직한 김교장은 사실상 용동중학교의 산 역사에 다름없다. 특히 부임이래 개인과 가정을 거의 돌보지 못하고 10여년 동안은 거의 무보수에 가까운 생활을 하면서 오로지 학교 발전에 온 열정을 바쳤다.

“교육은 제자를 키워 나라와 민족을 위해 바치는 겁니다. 희생과 인내를 바탕으로 지역사회의 조건과 특수성을 잘 반영해야 지역과 함께 발전하는 학교가 될 수 있다는 게 저의 철학이자 신념입니다.”

그의 이러한 확고한 신념으로 말미암아 적어도 용동중학교 교사가 되려면 특별한 각오를 해야 했다. 우선 보수에 대해선 초연해야 했다. 학교재단이 넉넉하지 못한데다 국가 교육 지원금이 없던 시절인지라 봉급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 것은 교장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주거지를 양지로 옮겨야 했다. 서울 등에서 출·퇴근을 하게되면 늦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고 학생지도에 전념하기 어렵다는 것 역시 그의 지론이었다. 이에 따라 용동교사들은 ‘1시간 일찍 출근하고 1시간 일찍 퇴근’하는 생활을 감수해야 했다. 김이진 교장이 일반상식으론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집념과 과도하다 싶은 추진력을 보인 것은 남다른 신념과 열정이 바탕에 깔리기도 했지만 당시 용동의 현실에선 달리 방법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지금처럼 학구제가 없던 70년대 초반까지는 양지지역 아이들이 용동에 진학을 꺼려했어요. 시쳇말로 ‘똥통학교’라는 소릴 주민들 사이에서도 했을 정도니까요.”그런 이유로 해서 김교장은 ‘막걸리 교장’이란 별칭을 얻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담임 선생님들을 찾아다니며 용동중 입학을 사정해야 하는 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용동중과 김이진 교장의 처지가 서서히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74년부터다. 용인시 중학교 학력고사 평가에서 1등을 차지했던 것. “당시 그 결과를 교사나 교장선생님 조차도 믿으려 하지 않았어요. 늘 하위권에 있던 뒤 처진 학교로 인식돼 왔었으니 당시론 당연했죠.”안종옥 현 교장의 회고다.

명문고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들어서부터다. 영재들만이 입학할 수 있다는 경기과학고가 처음 개교하던 해 60명 정원 중 용동중은 2명을 합격시켰다. 그 외 서울소재 외국어고에 입학율 역시 전국 상위권을 놓치지 않았다. 전국 규모의 수학·과학 경시대회에 출전한 학생들이 여러 차례 1위 입상을 하기도 하는 등 그 명성은 이제 용인지역사회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

그러나 김교장이 성적위주의 교육관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전인 교육을 통한 조화로운 교육이라는 목표를 분명히 한 그는 특별활동을 강조했다. ‘용동중학교를 졸업할 땐 최소 2개 악기는 연주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러한 교육방침의 결과다.
리코더반, 기악반, 무용반, 서예반, 미술반, 영어회화반, 컴퓨터반 등이 매일 스스로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무용반 활동은 경기도에선 경쟁학교가 없을 정도로 무용 명문으로 자리잡고 있다.

“교직이 생계수단인 동시에 자아성취와 인생의 업이라는 점이 여타의 직업과 그 가치가 다를 바 없지만 인간을 대상으로 그 행동을 변화시켜 준다는 점에서 확연히 구별 된다.”며 교직의 특수성을 강조하고 “그래서 교직은 성직”이라고 말하는 김이진 교장.


“용동은 내 교육 이상 펼친 터전”

1923년 2월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 강점기 암울한 시대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지만 폭넓은 세상구경을 일찍부터 했다. 1944년 일본 기옥중학교 5년 과정을 마치고 중국사회도 몇 년을 머무른 적이 있다. 그리고 교직에 뜻을 둔 것은 해방 다음해인 1946년 성균관대학교 정경학부 경제학과에 입학하면서부터다. 6.25사변으로 인한 혼란기 속에서 1.4후퇴때 충남 아산 둔포면에서 피난생활을 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1953년 1월 둔포 중학교 교사로 임용됐다.

그 이듬해인 1954년 10월부터는 교감으로 재직하면서 학교 관리와 경영에 대한 이론과 실제를 나름대로 체득할 수 있었다고 말하다. 둔포중학교에서의 10년간 교직생활을 바탕으로 1962년에는 중학교 교장 자격을 얻게 되었고 그 후 용동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해 30년 이상을 생활했으니 용동은 곧 그의 새로운 고향이요, 이상을 펼 수 있는 터전이기도 했다. 학력 향상을 통한 지역사회와 국가의 인재 육성, 지덕체를 중심으로 하는 전인교육, 세계화에 발맞춘 국제인의 양성 등 그의 교육관은 용동의 현재 모습에서 고스란히 실현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지난 40여 년간 오직 한길만을 걸어왔습니다. 그 기간 속에는 물론 많은 시련과 좌절의 시간이 있었고 보람된 시간도 있었어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이 교육자였다는 것과 인생의 시작을 교육에서 출발해 그 끝을 교육자로 맺었다는 겁니다.”

77세인 그는 지금 병상에 누워있다. 그러나 한 순간도 ‘교육자이자 영원한 용동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있다.



<이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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