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에서 묵리 골짜기로 승용차로 10여분 남짓 가다보면 50여평 남짓 하얀색 지붕 아래 장애인과 치매노인들의 보금자리가 산 아래 나즈막히 자리를 잡고 있다.

10여명의 장애인과 노인들 한 가정을 꾸리며 옹기종기 모여 사는 곳, 소자의 집(원장 배중희·이동면 묵리).

문을 열자 이 곳이 어떤 곳인지를 말해 주듯, 서너명의 노인들이 초점 없이 벽을 응시하고 멀리에서는 울음소리인지 화를 내는 소리인지 모를 한 노인의 말소리가 벽을 뚫고 들려온다. 한쪽에는 머리를 곱게 빗은 한 노인이 미소를 머금고 반갑게 맞아 준다. 중풍을 앓은 노인들과 정신장애를 앓고 있는 청년들, 그리고 치매 노인들이 모여 사는 비인가 복지시설 소자의 집.

배중희(65) 원장이 이 곳 묵리에 소자의 집을 짓고 장애인 노인 등과 함께 산 것도 벌써 올해로 20년이 넘었다. 20년이면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었을 세상이지만 이 곳은 예나 지금이나 세상과 너무 멀리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배 원장과 이들 장애인 노인 등과의 인연은 1981년 천주교 성경 세미나 봉사자로 안양교도소에 방문했을 때 20대 청년 무기수와 얘기를 나눈 것이 첫 시작이었다. 그 당시 무기수 청년과의 인연이 배 원장을 20년 넘게 소외된 사람들과 인연의 끈을 맺을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당시 무기수 청년을 만나고 돌아온 배 원장은 밤새도록 “어머니로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교도소 재소자들을 위해 성경세미나 봉사를 계속하는 것이 내가 가야할 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던 중 감옥에서 출옥한 한 청년이 ‘갈 곳이 없다’며 집에 찾아와 지내면서 81년 겨울, 새로 집을 짓고 장애인과 전과자 등을 받기 시작한 것이 소자의 집의 시작이었다.

지금은 이웃들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전과자와 장애인 등 수십명이 마을에서 모여 살자 주민들의 신고로 수 차례 경찰과 검찰에 불려 가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초기에는 원생이 50여명 정도로 많았지만 주민들의 잦은 신고로 다 떠나보내고 오갈 곳 없는 노인과 장애인 4명만이 남아 배 원장과 함께 지낸 것이 벌써 20년이라는 세월을 훌쩍 넘겨버렸다.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어려움이 많았지요. 한 번은 검찰에 불려가서 ‘가정과 나라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한 어머니로서 돌보는 것도 나라 법을 어기는 거냐’고 항변했더니 고압적인 자세로 죄인취급을 하더라고요. 그 때의 겪은 일이 어쩌면 소자의 집을 더 열심히 운영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했는지 모르겠네요.”배 원장의 과거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전과자를 식구로 맞는데 두려움은 없었냐”는 우문을 던지자 배 원장은 “왜 없었겠냐”며 “하지만 그 아이들이 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지를 생각하면 답은 명확하지 않겠느냐”고 오히려 반문했다.

그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전과자에 대한 선입견이 장애인을 더 병들게 하고 전과자를 범죄로 내모는 것”이라며 “신체적 장애보다 정신적 장애가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지 않느냐”고.

이들과 생활한 뒤로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해 원망을 했던 자녀들은 이제 배 원장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배 원장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더라고 ‘소자의 집’은 계속 남아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21년이 흐른 2002년 겨울. 40대 중년의 한 여인이 어느새 60대 노인이 돼 15명의 늙고 병약한 환자들과 서로를 의지하며 보금자리를 꾸미고 살고 있는 곳.

소자의 집은 정신장애를 앓고 있는 청년들과 치매를 앓고 있는 노인들, 그리고 중풍을 앓고 있는 노인들.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팔과 다리가 되어 기대면서 그렇게 겨울을 보내고 있다. (031-332-3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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