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 조씨

대다수의 조선시대 여인들은‘여필종부’와‘삼종지도’로 대표되는 태생적 운명 앞에 자신을 버려야 했다. 최고의 덕목을‘현모양처’로 삼았던 그 시대 여인들은 아무리 뛰어난 능력과 재주를 가졌다해도 이를 사회적으로 펼칠 수 있는 기회를 갖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한 시대를 대표했던 조선의 여성들이 용인과 인연을 맺고 있었다. 원삼면 맹리 세장지(世葬地)에 시비가 있는 난설헌(蘭雪軒) 허초희(許楚姬, 1563∼1589). 신동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뛰어난 글재주와 아름다운 용모를 갖추었던 그녀는 허균·허봉 등 오빠들과 함께 당대 최고의 문사가문 일원이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은 물론 일본에까지 이름을 알린 세계적인 여류시인이기도 했다.

또 한 사람을 꼽으라면 당연히 이사주당(李師朱堂, 1739∼1821)이다. 실학의 대가로서 우리말을 연구해 언문지(諺文志)를 펴낸 유희 어머니이기도 한 그녀는 동양에서는 물론 세계 최초로 태교에 관한 사항을 집대성, 「태교신기」를 저술한 18∼19세기초의 선각적 여성이다. 이사주당은 용인으로 시집와 살았고, 모현면 왕산리에 묻힘으로서 용인과 깊은 인연을 쌓은 여성이다.

허난설헌과 이사주당처럼 스스로 문집이나 저술을 남겨 후대 선각자로 추앙받는 여성이 있다면 전형적 현모양처로서 행장(行狀)을 통해 후대에 알려진 한 여성이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대문장가이자 정치인 서파(西坡) 오도일(吳道一. 1645∼1703)의 어머니, 한양 조씨(漢陽 趙氏, 1609∼1669)가 그다. 비록 사대부 집안의 여인으로서 영의정 시아버지를 모시고, 판서 아들을 둔 안주인이었지만 호는 물론 이름조차 남기지 않은 채, 한 시대를 살다 간 당시의 많은 여성들 중 한 사람이었다.


공부에 재능을 보였던 어린 시절

한양 조씨(1609∼1669)의 아버지는 의빈도사(儀賓都事) 간(幹)이요, 어머니는 청송 심씨(靑松 沈氏)였다. 그녀는 광해군 1년(1609) 8월 29일에 태어났는데, 특이한 자질을 타고나 행동거지가 보통아이들과는 달랐다. 여섯 살 때에 어머니 심씨가 세상을 뜨자, 서모의 손에 길러졌다. 어린 시절에는 성장이 자못 굳세고 조급하여,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으면 별안간 외치고 울어대면서 먹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하루는 갑자기 스스로 반성하면서, “나는 이미 의지할 어머니도 여의었는데 비록 화가 치민다고 먹지 않은들 어느 누가 내가 잘한다고 근심스럽게 여겨줄 것인가. 단지 나에게 손해만 있을 뿐이구나!”하고는 그때부터 아무리 화가 치미는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가슴에 삼키고 참아내며 절대로 화내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도일의 외삼촌 교리공(校理公) 조중려(趙重呂)는 젊은 시절에 학문에 힘쓰고 문장 공부에 온갖 노력을 바치느라 밤과 낮으로 끊임없이 책을 읽었는데, 어머니 한양 조씨는 겨우 7∼8세 나이에 교리공 곁에 있으면서 글자를 물었다.

그러나 여자란 문자를 깨칠 필요가 없다는 이유로 꾸짖으며 말해 주지 않았는데, 몰래 알아차려 암송 할 수 있었으니 집안 사람은 모두가 기특하게 여겼다한다. 시험삼아 「사략(史略)」을 가르쳐주자 춘추전국시대를 벗어난 역사에 대해서까지도 익혀 나갔다. 그 나머지에 대해선 가르쳐 주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깨달아 막히는 곳이 없었다. 14∼15세 때에 외갓집에 가서 여러 외삼촌들과 더불어 시를 읊었는데, 단연 빼어났다.


“우리 며느리는 사군자”

도일의 어머니 한양 조씨는 22세에 종친부 전참 오달천(吳達天)의 계실(繼室:두번째로 결혼한 부인)로 시집왔다. 조씨 부인은 행할 예대로 지키며 어긋나는 일이 없었고, 시아버지(추탄 오윤겸)를 섬기면서 정성과 공경의 마음을 다하였다. 아래 사람들을 거느리면서도 관대하고 자애롭게 대했다. 전부인 능성 구씨가 낳은 도종(道宗)과 도륭(道隆)이 있었지만 자신이 낳은 아들과 아무런 차이 없이 보살폈다. 또 시동서 들이나 여러 첩과의 사이에서도 초연한 행동으로 처신해 말을 하면서도 귀에 대고 소곤거리는 태도를 절대 취하지 않았다.

도일의 할아버지 추탄공은 항상 칭찬하며 남에게 말하기를 “우리 며느리는 사군자(士君子)로다”라고 했다. 남편 달천이 여러 고을의 원님을 역임했는데, 거쳐갔던 고을의 관속이나 여종들까지도 반드시 매우 조씨 부인을 그리워하면서 잊지를 못했다 한다. 부인의 성격이나 기질이 화평했고, 사람을 대접하되 귀천이 없게 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환심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조 25년(1647) 겨울에 달천은 충청도 면천군 현령으로 있을 당시 병을 얻어 아산군 신창에 있는 임시거처로 갔지만 병환이 점점 깊어져 마침내 다음해인 인조 26년(1648) 정월 초하룻날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당시 조씨 부인의 나이 40세였다. 홍성 결성(結城)에 있는 농장으로 돌아가 3년상을 보냈다.

이때부터 집안 살림은 더욱 기울었지만 서울로 올라갈 의사는 없었다. 그러나 유독 아들 도일(道一)이 총명했기 때문에 가르치지 않을 수가 없어, 효종 2년(1651) 봄에 가족을 이끌고 서울의 옛집으로 돌아왔다.

단 하나 자식을 교육시키는 것만을 일삼으시며 가난하다는 이유로 마음 아파하지 않고, 비록 아침저녁의 끼니거리가 자주 비워 있어도 태연하게 지냈다.

항상 눈물을 흘리면서 아들 도일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미 하늘같은 남편을 잃었으니 살아 있은 들 무엇을 하겠느냐? 그러나 죽지 않는 이유는 네가 있기 때문이다. 네가 만일 스스로 힘쓰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다. 또 “남자의 행실은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고 명예는 후세에 밝혀진다. 진실로 가정 안의 행실을 닦지 않으면 그 나머지는 볼 것도 없는 것이다.

더구나 너야 과부의 아들로서 더욱 그런 점에 대하여 삼가지 않을 수 없다.”라고 했다.


나라 걱정을 시로 읊어

한양 조씨가 살던 시기는 나라 사정이 어지러운 때였다. 특히 현종 8년(1667) 봄에 오래도록 가뭄이 들어 백성들의 생활은 극도로 어려워졌다. 평소 역사책을 좋아해 동서고금의 역사에도 밝았지만 시국의 어려움을 근심하고 나아가 잘잘못에 대해 분개하는 마음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사회적 발언은 아니었을지라도 자신의 마음을 한편의 시에 담아 남겼다. 「기민탄(飢民歎)」이란 시다.

곡식 값이 금값처럼 비싸구나
불쌍한 백성들 누구에게 의지하리.
벼슬하는 선비들 조정에 가득하나
시국 풀 재주는 왜 그리 부족한가.
어리석은 아낙네 헤어림이 어긋나는지
안민의 계책 보지 못한다오.
깊은 밤에 이런 생각하다 보면
탄식하다 괜스레 울음소리 삼킨다네.

穀價貴如金, 蒼生竟何賴.
士類盈朝廷, 豈乏匡時才.
遇婦錯料事, 不見安民策
中夜念及此, 歎息空呑聲.

무능한 조정에 대한 질타와 분노가 숨김없이 배어난다. 그는 이런 시를 틈틈히 적어 남겼다. 그런 그를 두고 도일의 외삼촌이 “우리 누이가 남자가 되어 제대로 학업에 전념했다면 당연히 우리 나라 명문장가들의 뒤에는 있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했다는 말은 결코 괜한 소리가 아님을 알수 있다. 그런 조씨 부인은 현종 10년(1669) 4월 그믐날에 각기병을 얻어 꼬박 7개월을 보내고 10월 4일, 61세의 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비록 시대적 사정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뜻을 세상에 펼 수는 없었지만 현모양처로서의 도리를 다하면서도 고명한 식견과 함께 뛰어난 시문으로 세상을 논했던 운둔 문사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듯 싶다.

아름다운 마음씨로 훌륭하게 자식을 키워내고 지극한 효성을 실천하는 가운데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갖고 조용히 펼쳤던 한양 조씨 부인. 그야말로 그 시대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여인상이 아닐까.


·자료 출처: 오도일의‘서파문집’중 선비행장
·자료 제공: 박용익(용인향지모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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