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에서 중등교육기관이 생긴 것은 해방 이후였다. 공립인 용인중학교가 1947년 7월에 개교했고 이어 양지 용동중학교 등 곳곳에서 학교가 생겨나기 시작해 해방된 새 나라의 민족 교육 산실로 자리잡아 갔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탄생한 사립 중등교육기관이 있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9월에 개교한 학교가 태성중학교다. 남동 노고봉 산자락 높직한 터전 위에 자리잡은 후 용인의 대표적 사학명문으로 자리잡은 태성학원의 첫 출발은 우재(又齋) 이병묵(李炳默, 1876∼1950)선생에 의해 이뤄졌다.


경술국치에 홀연히 벼슬 버려

만석농이자 ‘영천댁 승지어른’으로 불렸던 그는 평해군수를 역임하고 충청도 수군절도사 겸 보령도호부사를 지낸 이봉구(李鳳九)와 능성 구씨(綾城 具氏) 사이에서 1876년 6월 19일 태어났다. 그가 난 천리 노루실 마을은 이조판서를 지낸 농재(農齋) 이익(李翊, 1629∼1690)의 생장지이자 조선조 후기 성리학의 대가 도암 이재(李縡, 1680∼1746)선생이 태어나 공부하던 곳으로 독서대와 한천서원 등 그들과 연관된 흔적이 많은 곳이다.

우재 선생이 태어난 해는 사양문물 유입을 강력히 반대하는 위정척사운동이 일어났고 이어 강화도 조약에 의해 강제로 일본에 개항을 허용하는 등 서양과 일본제국주의 세력이 본격적으로 이 나라에 손을 뻗쳐 올 시기였다. 그럼에도 그의 어린 시절은 매우 유복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선대에서부터 천석지기였고 농재공파(農齋公派) 대종가 종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동면 천리 가숙에서 학업에 정진하였으며 당시 양반 자제들의 일반적 진로를 걷기 시작했다. 13세 때인 1888년에 진사시에 합격, 출사한데 이어 다음해(1889)엔 참봉을 거쳐 1901년(대한제국 고종 5년)엔 의관(議官)이 되었으며, 이어 영천군수(榮川郡守)와 오천군수(鰲川郡守)를 역임했다.

그후 을사년(1905)에 내직에 들어와 비서감승(秘書監丞)으로 승진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의 벼슬길도 경술국치(1910)이후엔 아예 접어버렸다. 일제에 의한 강제 병합은 그간 단계적으로 밟아온 식민지과정의 결정판이었다. 자주권을 완전히 빼앗겼고 조선총독부를 통해 무단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 우재 이병묵이 몸을 피하여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집안과 농사일을 돌보는데 전념했다는 것은 그의 일제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가졌던 강직한 그의 일면이 드러난다. 우재 선생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치산에만 힘써 마침내 ‘삼만석지기’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만한 부를 쌓기까지의 과정은 지금도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근면 검소하기만 했던 ‘삼만석지기’

어느 날이었다. 우재선생이 외출을 했다가 무너미 고개를 넘어 돌아오는 중이었다. 그런데 상자를 짊어진 웬 당나귀가 주인을 잃고 혼자 주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이상스러워 한참을 기다렸지만 주인은 끝내 나타나질 않았다. 할 수 없이 당나귀를 끌고 와 살펴보니 상자에는 돈이 가득했다. 몇 해동안 주인을 기다렸지만 오질 않아 나중에 주려고 땅을 사 열심히 경작한 것이 결국 큰 부자가 됐다는 것이다. 이동면 덕성리 소진혁 옹(89)이 들려준 전해지는 얘기다.

그러나 실제는 종손으로써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과 그의 근면 검소함 때문이었다. “어디 사람으로써 하고 싶은 일을 다할 수 있느냐”며 “큰 돈보다는 작은 돈을 아껴 써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는 것이 이민영(89·전 용인우체국장)옹의 기억이다. 바지 주머니를 이중으로 만들어 지폐와 동전을 따로 넣을 수 있도록 했다는 일화와 함께 서울에 기거하면서도 택시 한번 타는 법이 없고 항상 대중교통인 전차와 버스만을 이용했다 한다.

부자댁이라 하여 흥청망청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봉이씨 농제공파 종중에서 만든 ‘문중보감(門中寶鑑)’에 의하면 ‘하루는 괴내댁 종주께서 서울 종가댁에 가서 식사를 하는데, 밥상 찌개 속에 덩어리가 있어 이를 육류로 알고 덥석 먹었는데, 그것이 된장 덩어리여서 짜서 혼났다’는 일화가 들어 있다.

그토록 큰 부자임에도 근면검소했던 그는, 빈민구제에도 힘썼다. 이민영 옹에 따르면 “여러 해 동안 흉년이 거듭되자 노루실 사람들이 배를 주려 부황이 났다. 이때 승지어른(병묵)이 서울에서 내려오셔서 좁쌀 여러 마차와 백미 수십 석을 매입하여 기근과 기아에 허덕이는 마을 사람들을 구제하였는데, 이와 같은 일을 본 것만도 세 번이나 됐다”고 한다.

우재 선생은 또 매년 섣달 그믐이면 노루실 각 댁마다 쇠고기 1근, 북어 1괘, 양초 1갑, 약주 1병, 창호지 1필씩 세찬을 내렸다고 한다.

타고난 성품은 호방하고 밝았으며, 그릇됨이 크고 너그러웠고 세상을 바라보는데는 의연하였으나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다는 우재 이병묵. 부모에게는 효도를, 친척에게는 우애를 다하였던 그가 용인의 많은 이들에게 더욱 기억되는 것은 거액의 사재를 털어 용인 최초로 중등교육기관을 설립한 것이었다.


“가난한 아이들에게도 중등교육 기회를”

그가 1946년, 태성학원 설립에 나선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무엇보다 해방된 나라 건설을 기념하기 위함이었고, 고향의 중등교육기관이 없는 점을 안타깝게 여겨, 도암 이재 선생 이래로 학문을 한 집안으로써 마땅히 그 몫을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태성학원을 설립한 가장 큰 뜻은 ‘부의 사회적 환원’에 대한 강한 의지였다.

나라 안에서도 몇 째 안가는 대지주였지만 가난에 허덕이는 많은 소작인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가난을 대물림하는 사회구조에서 이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교육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이런 마음이 확인되는 것은, 그가 학교 설립 이후 한 동안 학생들에게 등록금 없이 무료교육을 실시하고, 심지어는 교사들 급여마저도 직접 주머니를 떨어 주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그는 쌀 1천석을 거둬들이는 땅을 희사했다. 당시 용인면장이던 신현정(작고. 초대교장)씨를 기성회장으로 추대하고 재단법인 설립을 마쳐 1948년 첫 졸업생 72명이 배출됐다. 태성학원은 그후 고등학교 설립까지 마쳐 용인의 대표적인 사학으로 자리잡았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인재양성의 산실이 됐다.

영천군수를 지내‘영천댁’이란 택호(宅號)와 함께 비서감승(秘書監丞)벼슬로‘승지어른’으로 불렸던 우재 이병묵. 그는 헌영, 관영, 재영, 홍영 등 네 아들과 1녀를 두고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950년 2월, 75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용인 최초의 중등교육 기관을 자비로 설립해 지역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였던 그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송덕비가 태성중·고 교정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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