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진 순국열사

한국 민속촌 내 충현서원(忠賢書院)에는 용인의 대표적 ‘4대 충신’위패를 모신 충절사(忠節祠)가 있다. 고려조의 마지막 충신이자 선비정신의 표상인 포은 정몽주, 병자호란 때 삼학사(三學士)중 한 분으로 청나라에 끌려가 죽임을 당한 추담 오달제, 1905년 을사늑약에 항거해 국권회복을 외치며 순국 자결한 계정 민영환. 이들은 한결같이 한 시대를 상징하는 충신들이자 용인을 ‘충절의 고장’으로 불리게 하는 장본인들임에 틀림없다. 그럼 충현서원 충절사에 모셔진 마지막 한 분은 누굴까. 그가 바로 순국열사 오천 김석진(梧泉 金奭鎭, 1843∼1910)이다.


18세때 정시문과로 출사

향토사학계를 비롯한 지역사회 내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오천 김석진은 조선말기의 문신으로 항일 우국지사이며 망국에 항의해 순국한 인물이다. 본관은 안동, 호는 오천(梧泉)이다.

1847년 1월 21일 서울에서 출생한 오천은 조선조 23대 순조 임금의 둘째 따님인 복온공주(福溫公主,1818∼1832)와 부마 김병주(金炳疇)의 손자이다. 그는 또 병자호란(1636년, 인조 14년)때 화의(和議)를 극력 반대, 청국 심양에 3년간 갇혀 있다 돌아온 척화신 좌의정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의 후손이기도 하다.

오천이 출사하던 19세기 후반은 척족 세력인 여흥 민씨와 세도가문이었던 안동 김씨가 권력의 핵심을 이루던 시절이었다. 그 역시 화려한 가문을 발판으로 삼아 벼슬길에 나아가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18세이던 1860년(철종11) 인일제(人日制)로 정시문과 병과에 급제했다. 인일제란 특별시험인 별시 중 절일제(節日製)의 하나로 1월 7일 치러지는 과거였다.

오천은 승정원 주서(承政院 注書), 성균관 전적을 역임하고, 홍문관의 관직과 이조참의에 이어 한성 좌, 우윤 및 참판, 판서 등을 지냈다. 외임으론 안주목사(安州牧使), 경주부윤(慶州府尹), 삼도육군통어사 등을 역임했다.

1884년(고종 21) 김옥균(金玉均)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개화사상을 바탕으로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켰던 갑신정변. 그리고 10년 뒤인 1894년(고종 31), 농민들이 궐기하여 부정과 외세에 항거했던 갑오농민혁명. 동학농민군을 진압한다는 구실로 이 땅에 들어와 침략을 목적으로 그 때까지의 문물 제도를 근대적 법식에 따라 고친 갑오경장 등 엄청난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그가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는 제대로 알 수 없다.

다만 “천성이 강직했던 그는 평생 장의입절(仗義立節)한 사실을 읽으면 통분의 눈물을 흘리지 못하였다”는 기록으로 봐 시국에 대한 걱정이 그 누구보다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1894년 갑오경장 후에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등을 거쳐 1901년(광무 5)에 판동녕부사(判敦寧府事)를 지내고 계직(階職)이 종일품 숭록에 이르렀지만, 을미사변(1895)이 있은 직후 시국 근심에 벼슬하기를 즐기지 않았다.


오적 성토하며 관직 버려

왕실에 가까웠던 그는 차마 멀리 떠나지 못하고 서울 가까운 양근 강상(현재 양평군 강상면 연양리)에 사안당(思安堂)을 지어 은거했다. 그러면서도 음주한 뒤에는 격앙돼 눈물을 흘리며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아침에 자리를 보면 항상 눈물 흔적이 있었다 한다. 사실상 은퇴를 표명하고 10여 년의 세월이 이러했다.

그러나 국운이 흔들리던 그 시기, 그의 눈과 귀는 항상 조정을 향해 있었다. 대한제국이 세워지기 한 해전인 1896년, 민영우가 월미도를 일본에 몰래 팔았으나 죄를 묻지 않은 사실을 접하고 오천은 어전에 나가 이를 질타하니 조정이 숙연하였다 전한다.

“오늘에 한 섬을 팔고 내일에 한 섬을 판다면 한 섬도 남지 않아 장차 한 나라를 다 없앨 것입니다.” 그가 던진 말이다.

마침내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를 들은 오천은 급히 한양으로 가 강제조약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5적(五賊)을 죽이고 각 공관에 성명을 내어 맹약을 파기하기를 청하였다. 당시 조인한 박제순,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권중현 등 ‘을사 오적’을 극형에 처할 것을 요구하는 동시에 강제로 체결된 조약인 만큼 외교를 통해 무효화 할 것을 주장했다. 을사토역소(역적을 성토하는 ‘소’)를 통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엎드려 바라 건데 외부에 명하여 각 국 공관에 성명하고 공법을 펴시어 조약에 서명한 5적을 극률로 다스리시어 왕장을 펴시고 종사를 편안케 하소서. 또 신은 의에 저들과 한 하늘에 함께 하지 못하겠으며 엄숙한 향반에서 더욱 비견 주선 할 수 없사오니 신의 의효전향관(懿孝殿享官)을 삭제하시어 신으로 하여금 적은 뜻을 지키게 하심을 피를 흘리며 바라마지 않는 바입니다.”


망국 한 품고 순국자결

그가 결국 관직을 끝내 사퇴한 것도 을사오적 중 하나로 함께 향관(享官)된 이지용과 일할 수 없다는 이유였던 것이다.

“…을미국변에 자결하지 못하고 또 다시 한 목숨을 구차히 보전해, 주리면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어 조금도 예사 사람과 다름이 없사오니 타고난 양심이 어찌 이에 이르렀습니까? 아아, 을미년의 변고는 만고에 없는 일입니다.…신처럼 임금의 성은을 편중하게 입은 자로서 비록 먼저 하찮은 목숨을 버리지 못하였을망정 어찌 차마 사모를 쓰고 다시 벼슬길을 찾겠습니까?”

사직겸진소회재소(辭職兼陳所懷再疏)를 통해 그의 심경을 밝히고는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는 가운데 오천은 마음 속 깊이 간직한 결심을 서서히 옮기기 시작했다. 때는 이미 용인의 인물 이한응에 이어 민영환, 조병세 등이 잇따라 순국했던 터였다. 오천은 충정공 조병세 상을 갔다오다 하인을 물리치고 홀로 청시(淸市)에 들어가 아편을 사서 주머니에 감추어 품었다. 이때부터 오천은 성내에 발을 끊고 오현(현 서울시 성북구 번동)에 은거하며 항상 죄인으로 자처하고 때를 기다렸다.

그런지 5년을 넘지 않아, 1910년 한일 병합이 되었다. 일제는 황실과 대관에게 작위와 금화로 협박하고 위력으로 협박하면서 회유했다. 오천에게도 남작 작위가 내려졌다. 이에 치욕을 느낀 그는 엄한 말로 작위를 물리친 후, 식구들을 내 보내고 몰래 감췄던 아편을 꺼내 삼켰다. 망국의 한과 품은 채 순국 자결한 것이다. 이승을 등진 이 날은 그 해 9월 8일로 오천의 나이 68세였다.

서울 강북구 번동 오현 선영에 장사지낸 후 1956년, 진안 영광사에 봉향(奉享)하고 6년 후인 1962년 3월 1일, 정부는 그의 충절을 기리어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다. 오천 김석진의 묘소가 원삼면 죽능리에 자리잡은 것은 1996년 봄이다. 원래 양주 율북리 목식동 설곡에 있던 것을 선영 전체가 용인으로 옮겨와 오광선 장군의 고향 뒷산에서 영면하게 된 것이다.

충의정신을 우리 가슴속에 새겨준 오천 김석진. 불의에 굴복하고 영화를 누리느니 차라리 목숨을 버렸던 그의 삶은 분명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크나 큰 감명과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자료제공·안동김씨 동강공파(東江公派) 종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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