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에 있는 현대의원. 여느 곳과 비교해 특별할 것이 없는 한적한 소읍의 작은 개인의원이다. 그러나 한 시간 가량 앉아 있어보면 무언가 다른 구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환자의 연령대다. 의원 문을 드나드는 이들 중에는 노인들이 유독 많다. 옷섶을 헤치는 할머니 환자나 청진기를 들이대는 의사. 환자와 의사의 관계를 떠나 스스럼없다. 먼길을 나와 들렀다가 “원장님이 없어 집에 갔다가 또 왔지요”하는걸 보면 단골임이 분명하고, 관계 역시 특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동식(72) 원장. 체격은 왜소해도 다부져 보이는 그와 노인들의 관계는 원삼면 보건소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용인과 처음 인연을 맺은 때는 1980년. 개업의사였던 이 원장은 아는 이의 소개로 원삼면 보건소장을 맡게 됐다. 개인병원을 겸했던 그가 본 농촌의 의료환경은 생각 밖이었다.

이미 농촌 인구는 노령화 단계에 들어선 데다가 잦은 노인질병과 각종 농촌 재해로 인한 환자들이 많이 발생되고 있음에도 치료환경은 크게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었다. 장비뿐만 아니라 제반 여건이 두루 그랬다.

진료시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밤중에도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환자들이 있었으니, 진료는 24시간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전거로 왕진하던 옛 시절 못잊어

그러나 의사인 그에게 원삼에서의 의료활동은 의술의 참 의미와 특히 노인들에 관심을 갖게 한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위급한 산모가 있으면 산파역할도 해야 했고 교통이 여의치 않은 외진 곳에 환자가 있으면 자전거를 타고 왕진을 가야 했다. 살림이 궁색해 치료비를 제대로 낼 수 없는 처지에서도 곡식을 갖다주며 어떤 방식으로든 답례를 하고자 하는 농촌 노인들의 순수하고 고결한 마음씨, 전적으로 의사를 믿고 찾아오는 것은 물론 가정 대소사까지 의논하려 하는 그들과 함께 하면서 어느덧 이 원장은 정서와 생활까지 동화돼 버린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편안함과 신뢰는 이 원장의 신조

내 식구(?)를 돌보는 마음에 치료비는 문제가 안됐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어느 날이었어요. 병원 문을 다급하게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며느리가 산통을 겪고 있다며 산모와 아기가 같이 죽을 판이라며 뛰어 온 것이었죠. 학일리 먼길을 달려가 무사히 출산을 도울 수 있었죠.” 사정을 알고 보니 산모는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처지였던 것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사암리 저수지 근처에 사는 노인이 찾아왔다. 얘기를 들어보니 복수가 차 X-Ray 촬영을 해야 하는 처지였다. 검사를 준비하는 동안 환자가 없어졌다. 좇아가 사정을 들어보니 “사진을 찍게 되면 돈이 많이 들어갈까 봐 그냥 간다”는 거였다. 3개월을 치료해 병이 나았다. 물론 두 경우 모두 치료비는 받질 않았다.

그가 특히 보람을 느끼는 것은 농촌의 특수한 사정으로 인한 환자들을 돌볼 때다. 농촌은 탈곡 도중 손가락이 잘리는가 하면 농약 중독 등이 적지 않다. 빠른 대처를 요하는 환자들을 살려냈을 때 그 보람과 기쁨은 더하다.

양지로 옮겨 진료를 계속하고 있지만 원삼에서의 의료활동은 어느 덧 입 소문으로 번져 환자들이 북적인다. 그가 의사로서 가장 중요하게 지키고 있는 지론은 편안함과 환자에게 신뢰를 줘야 한다는 것. “한 때 가운을 입지 않은 적도 있죠. 환자에게 편안함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였어요.”

또 그는 과다 진료를 절대 하지 않는 것은 물론 역량을 벗어나는 것에 대해선 분명히 선을 긋고 있다.


단신 월남 “용인은 마지막 고향”

이처럼 어려운 환자들을 살피고, 소박하면서도 다정한 이웃 집 아저씨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어려웠던 과거와 무관치 않은 듯 하다. 이 원장의 고향은 함경남도 흥남이다. 노랫말에도 있듯 ‘흥남 부두’는 그에게 추억의 장소다. 1951년 1.4후퇴 때 단신 월남한 그는 당시 해주의학전문대학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가족들도 모르는 사이 후퇴중인 미군 군수품 수송선을 따고 나오는 바람에 이별의 정을 나눌 틈도 없었다. 그가 도착한 곳은 거제도였다. 남의 집 머슴을 하면서도 그에게 결코 버릴 없는 꿈은 의학공부를 마쳐 의사가 되는 일이었다. ‘꿈꾸는 자에게 기회는 온다’는 사실은 그에게서도 확인된다. 몸이 아파 수도여자의과대학(현 고대의대 전신)을 찾았다가 고향선배를 만난 것이다.‘주인호’로 뚜렷이 기억되는 그의 도움으로 의대대학 연구실에서 청강생자격으로 공부를 다시 시작, 마침내 자격증을 얻게 된 것이다.

머잖아 은퇴를 해야 하는 이 원장은 더 이상 꿈이 없다. 이미 양지리 한적한 곳에 집까지 마련했고 텃밭도 일구고 있어 이곳에 눌러 앉을 생각이다. “이산가족으로서 통일이 된다해도 용인을 떠나긴 어려울 것 같다”는 그는 이미 토박이보다 더 용인사람이 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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