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경력 혐의를 받고 있는 인물 가운데 국가와 지역사회에 끼친 공로로 향토사에서 용인의 인물로 손꼽히고 있는 인사는 역사학자 이병도와 장로회 총회장을 지낸 원로목사 전필순, 서양화가 심형구 등이 대표적이다.

‘내고장 용인 인물총람’에서 이들 세사람 가운데 이병도는 국사학자로, 전필순은 우국지사로 기술하고 있고, ‘용인시사’에 이들과 함께 서양화가 심형구가 근대인물편에 올라 있다.

‘내고장 용인 인물총람’에 따르면 국사학자인 이병도는 용인군 이동면 천리 출생으로 와세다대학 문학부 사학급 사회학과에 진학, 조선사를 전공했다. 귀국 후 대학 은사의 소개로 조선총독부 중추원에 설치된 조선사편수회의 촉탁으로 한국고대사 연구에 힘썼다. 1934년 5월 이희승 등과 함께 진단학회를 조직, 창설했으나 1943년 일제의 탄압으로 한 때 진단학회가 해산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는 식민지 병합의 정당성 등 역사를 왜곡할 의도로 설치된 일제하 ‘조선사편수회’에서의 활동에 대한 언급이나 일본의 침략을 학문적으로 합리화한 식민사관의 총서인 <조선사> 간행에 참여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이 책은 이병도의 업적과 이력 그리고 수상경력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전필순은 1995년 용인군이 발행한 ‘내고장 용인 독립항쟁사’ 중 ‘구국간성의 발자취’와 같은 해 펴낸 ‘내고장 용인 인물총람’에 우국지사로 기록되고 있다.

이들 책에서 전필순은 장로파 대표로 독립운동 단체인 대동단 35인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다 옥고를 치렀다고만 밝히고 있다. 대동단 사건으로 구속된 1919년 27살 때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향토사에서는 전필순이 반민법 위반 혐의로 수감되었다가 불구속 처분을 받아 풀려났다는 사실은 전혀 전해지고 있지 않다. 반민특위 의견서에 의하면 “그는 예수교 목사로서 황민화운동을 적극적으로 해 조선 민족혼을 말살시켰고 일본의 침략전에 적극 협력했으며 일본 국책을 추진하기 위해 단체를 조직해 그 단체의 수뇌 간부가 되었다”고 밝혔다.

이병도, 전필순처럼 공로가 많은 인물을 한 때의 실수로 매도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향토계의 일반적인 풍토다.

이와 관련, 최근 열렸던 한 토론회에서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상임연구원은 “비록 한때 친일을 했더라도 민족에게 끼친 공로가 많으니 한때의 친일로 한 인간을 매도해서는 안된다는 논리는 문제가 있다”며 “친일파들이 부분적으로 공이 있더라도 민족 전체에 대한 범죄행위가 심각한데 정상참작이 아닌 면죄부로서 공을 격상시키는 것은 주와 종이 바뀐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 연구원은 “이들의 공과론에는 ‘공’은 내세울지언정 ‘과’는 결코 스스로 언급한 적이 없다”고 박 연구원은 덧붙였다.

박 연구원은 “당시 친일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주장하고 있지만 창씨개명이나 말단 생계유지형의 소극적 친일을 한 사람을 친일파라 한적 없다”며 “친일파는 자의든 타의든 지속적으로 일제에 협력하고 민중에 대해 해악을 끼친 적극적인 사람들을 뜻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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