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광복군 오희영과 3대 독립운동가

1백년 근·현대사를 경과하는 동안 반세기 이상을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의해 국토가 유린당하는 통한의 역사를 우리는 가지고 있다. 이 시기, 외세로부터 이 나라를 구하려고 분연히 일어나 항거했던 수 많은 애국지사들이 있었다. 이 중엔 용인에서 태어나 3대에 걸친 빛나는 항일투쟁 업적을 남긴 이들이 있었다. 구한말 경기 일원에서 의병투쟁에 앞장섰던 의병장 오인수가 그 1대요, 만주를 주무대로 해외 항일운동과 건국과정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운 오광선 장군이 그 2대다. 또 중국에서 태어나 아버지에 이어 항일운동을 했던 오희영, 오희옥 자매와 큰 사위가 3대다.

□1대 오인수 의병장(1867∼1935)

원삼면 죽능리 어현(느리재) 829번지에서 오태한과 김규일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병자호란때 척화파로서 끝끝내 항쟁을 주장하다 심양에 끌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3학사의 한 분인 추담 오달재의 후손이기도 하다. 명포수로 이름이 높았던 오인수 의병장은 1905년 한일늑약이 체결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경기도에서 궐기한 의병장과 정원욱과 함께 주력 부대장인 중군장으로서 용인, 안성, 죽산, 이천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또 같은 시기에 활동중이던 의병장 정철화 의병장과 합세해 혁혁한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죽능리 어동 고향에서 일진회장 송병준의 아들인 송종헌의 토벌대에 의해 잡혀가 10년 징역형을 받으시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중 감형을 거쳐 6년의 징역살이를 마치고 출옥했다. 중국으로 건너간 그는 1935년 10월 67세의 일기로 낯선 이국 땅에서 눈을 감았다.

□2대 오광선 장군(1896∼1967)

의병장 오인수와 이남천 사이에서 4남매 중 맏이로 태어난 오광선 장군은 본명이 성묵으로 21세 되던 1915년 광복 투쟁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보정군관학교를 거쳐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한 그는 졸업 후 교관으로 근무했다. 일본군의 대거 침공으로 북간도가 유린당하고 무장단체들이 근거지를 떠나 홍범도 장군의 정일군, 조동식 장군의 광복단, 김혁선생의 흥업단 등이 백하구로 집결해 통합해 만든 ‘대한독립군단’을 편성했을 때 그는 간부를 맡았다.
노령인 자유시 흑해사변 당시 구사일생으로 탈출하기도 한 그는 1930년 7월 한국독립당 의용군에서 총사령관 이청천 장군<사진>과 함께 주요 간부로 활동했다. 임시정부 김구주석의 일본관동군 사령관에 대한 암살지령을 받고 북경으로 건너가 공작준비 중 옆구리에 총을 맡고 잡혀 옥에 갇히고 만다. 그는 당시 오원지라는 가명을 쓰고 있던 관계로 3년형을 받았다. 해방이 되자 그는 단신 귀국해 하지중장과 담판, 비행기를 타고 중국에 건너가 김구 주석과 이청천장군 등을 모시고 귀국했다. 그는 광복군을 대한민국 정규군으로 키우기 위해 광복군 국내지대 사령관을 맡았으나 미군정의 반대로 무산되고 임정과 광복군이 배제된 국방경비대가 창설되자 이를 반대하다 1946년 광복청년회를 만들었다. 결국 광복군을 기축으로 한 건군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대립만 할 수 없어 국군에 투신, 육군 대령에 임명돼 지구병사구 사령관 등을 역임하고 육군 준장으로 예편했다. 1961년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된 그는 1967년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셋방에서 타계했다.

□3대 오희영·오희옥 자매

-1923년 중국 길림성 성하현에서 맏딸로 태어난 오희영(1923∼1970)은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들어가 활동했으며, 1940년 광복군이 창설되자 입대해 광복군 제3지대 초모공작대에서 초모공작위원으로 활동했다. 초모공작은 일본군 내부에 침투해 방송을 하거나 전단 등을 배포해 탈출을 유도하는 선무 공작의 하나다. 그의 남편인 신송식(1914∼1972) 역시 중국사관학교를 거쳐 중국군 장교출신으로 중일전쟁에 참전한 바 있는 동료였다. 오희옥 역시 언니와 함께 한국 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들어가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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