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헌 김명호


한 사람의 전기나 회고록은 단지 그 사람만의 기록이 아니다. 개인 삶은 스스로의 의지와 함께 그를 둘러싼 시대적 환경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죽헌 김명호(1887∼1969).

그는 비록 고관대작 벼슬을 하며 한 시대를 호령한 권력자도 아니요, 만주 벌판을 휘달리며 조국 광복을 위해 싸웠던 독립운동가도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살았던 한 시대의 시속변천을 꼼꼼한 기록과 한시로 담아 후대에 남김으로써 근·현대 용인지역사를 이해하는데 귀중한 사료를 제공한 인물이다.

죽헌은 교육자이기도 했다. 독학으로 탁월한 식견과 능력을 배양해 주위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던 그는 집에 서당을 차리고 후학들을 길러냈다. 또 고향마을인 내대지에 강습소를 설치하고 대지학교(현 대지초교)설립에도 깊이 관여했다. 일생을 인의예지로 선교하며 용인·광주일대 유림의 거성이었던 죽헌은 양지향교 명륜당신축에 참여하는 등 전통사회의 도덕적 축이었던 유교의 계승 발전에도 힘을 기울였던 인물이다. 구한말부터 박정희 정권 등장까지 격동의 한 시대를 살아온 죽헌. 그는 자임하진 않았어도 지역사회의 정신적 어른이었다.

# 일거수 일투족 기록으로 남겨

죽헌 김명호는 1887년(고종 24) 11월 23일, 도상 김교형과 남양홍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죽전 내대지의 집안이 넉넉지 않았던 탓에 학문의 길에 전념할 수 없었던 그는 집안 일을 도우며 주경야독해야만 했다. 서양 제국주의 열강의 도전과 갑신정변·갑오경장 등 우리 나라 근대 민족운동으로 요동치는 시대상황에서 청운을 꿈을 불태우며 소년시절을 보냈지만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일제의 강제병합은 그나마 그의 꿈을 앗아갔다.

젊은 시절에 대한 그의 뚜렷한 족적과 기록은 없다. 다만 그는 조상 대대로 전승돼온 미풍양속을 지키면서 조상을 위한 위선사업(爲先事業)에 충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용인과 광주일대 유림의 일원으로 지역사회에 참여해 당시 윤리도덕의 원천인 용인향교 명륜당을 보존하는데 큰 기여를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독학으로 익힌 한학의 깊이로 시작활동에 열심이었던 죽헌은 자신의 일상사를 그때그때 기록했다. 벗을 찾아 술잔을 기울이며 토론했던 이야기, 손자를 멀리 경성중학교에 보내고 걱정스레 지었던 글귀, 지인의 회갑연이나 친구 자녀의 혼인식에 다녀와서도 글을 남겼다. 특히 국가적 대 사건에 대한 그의 기록은 한 개인의 벅찬 감회와 고생담을 넘어 그 시대를 읽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祝 光復節
東邦此節 總京鄕 時到秋風 野欲黃
村老感思 門 枾 官員祝賀 席排 
外方得勢 千人諾 本國傳芳 萬歲香
極盡誠心 爲獨立 太平日月 無窮長

광복절을 축하하며
조선 경향각지 가을바람이 불고 들판은 누렇게 물드는데
촌노들은 깊은 감회에 문마다 국기를 달고 축하하는 관원들의 자리가 들썩이네.
외세의 득세는 많은 이들에 인정됐지만 조선 땅 만세소리가 향기롭게 퍼지네.
독립을 위해 온 마음을 다했으니 태평세월이 영원하여라.

이처럼 그에겐 청운의 꿈을 앗아갔던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되는 기쁨이 누구보다 컸으리라. 그러나 「죽헌집」에 전해지는 경인년 피난기(庚寅年 避難記)는 고난과 불행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지혜와 여유가 엿보인다. 우리 글로 풀어낸 그의 기록은 당시의 상황이 생생히 묻어난다.

“경인년(1950) 음력 오월 보름날 북이 남침하니 반도 삼천리가 삼팔선 때문에 인연을 끊게 되었네. 외정 36년간 고생만 하던 우리민족들은 을유년(1945) 해방은 되었으나 겨우 자유만 찾고 겨우 독립된 나라라고 하나 다시 거친 바람에 연기 일어났네. 대포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니 바다가 산과 밭으로 변하더라. 압록강으로는 중공군이 들어오고 인천항구 팔미도로 미군 함정이 가득 차있네.

인민군들은 산으로 붙어있고 거리에는 우마차 뿐일세. 피난갈 곳이 어디인고 주린배 웅켜쥐고 넘어지면서 남쪽으로 수백리 가면 그곳이 신선같을 것인가. 집 빌리기도, 셋방 얻기도 어렵고 양식과 돈 구하기도 어려워 예산 땅 일가댁에서 여러 달 동안 머물렀다. 돌아오는 길에 아산 땅에서 쑥 밭에 의지하다가 이듬해 2월달에 다시 고향산천에 돌아와 보니 70호나 되던 동네는 40호가 다 타 버리고 다행히도 내 집과 몇 동의 집이 남아 살게되고 모든 일을 돌아볼 것 없으니 생활은 가련함이 없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나 살고 있는 집이 있으니 어찌 태평하지 않으리.”

독학으로 익힌 풍부한 지식과 예민한 감수성으로 써 내려간 그의 시는 여유가 있었다. 또 뛰어난 문장력으로 글을 구성해 글에 걸림이 없는 문장가였다. 한문자(漢文字)만 알면 누구나 쉽게 해득하게 됐다.

그의 문학세계가 꽃 피웠던 것은 오히려 젊은 시절보단 노년기였다. 용인과 광주 나아가 서울 등지에서까지 동인들을 모아 「판교기로회(板橋耆老會)」를 조직했다. 지속적으로 간행된 시집에는 용인의 이용원(수지), 박승우(풍덕천), 이창훈(구성 보정리), 최병린(죽전리), 정명수(풍덕천리), 김용성(죽전리), 정덕화(모현 능원리), 성재영(수지 동천리), 김원성(구성 마북리), 이원철(구성 보정리) 등이 동인으로 참여했다.

교육자로서의 고향의 후진을 육성했던 그가 특히 심혈을 기울였던 것은 유림의 일이었다. 양지향교 명륜당신축에 참여했던 그의 흔적은 ‘용인향교 명륜당 중건 상량기’에서 확인된다. 현존하는 상량기를 그가 쓴 것이다.

# 근·현대사 걸친 ‘참 향토지킴이’

근동 20∼30리에선 ‘홍성댁 나리’로 불렸다는 죽헌. 서구의 배금사상이 걷잡을 수 없이 만연되자 전통문화가 추락함을 애석하게 생각했지만 시속을 따르는 세태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이에 그는 묵묵히 기록으로만 일거수 일투족의 과거사를 서술해 이를 후세에 전하고자 했다.
83세로 천수를 누렸던 죽헌 김명호는 끝까지 붓을 놓지 않고 ‘노유팔난(老有八難)’이란 시를 통해 노인들의 고통을 털어놨다.

“백발이 되고 얼굴이 쭈그러졌으니 젊어지기 어렵고, 귀 먹고 눈 어두우니 듣고 보기도 어렵고, 이가 빠지고 입술이 오그라졌으니 말하고 먹기도 어렵고, 몸과 다리가 무거우니 걸어다니기 어렵고, 마음이 괴이하고 이상해져 가정이 화목하기 어렵고, 여름에 더위와 겨울에 추위를 견디고 참기 어렵고 늙어서 벗이 없으니 오락하며 놀기가 어렵고, 세상이 싫어져서 죽고 싶어도 죽기도 또한 어렵다.”

비록 입신양명하진 못했지만 전통윤리를 소중히 여기고 늘 스스로를 담금질해 한 시대 지역사회의 사표가 됐던 죽헌. 그야말로 우리보다 두어 세대 앞서 간 진정한 ‘향토 지킴이’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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