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숙종 4년인 1678년 3월7일 마전군(麻田郡, 현재 연천군) 탄곡리에서 태어난 어유룡(1678∼1764)은 본관이 함종(咸從)이고 자는 경우(景雨)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어려서부터 자세가 신중하고 헛된 말을 하지 않았으며 서책으로 스스로 공부해, 꾸짖거나 하지 않아도 됐으며 10세에 경전과 사서에 능하고 20세가 못돼 명성이 높았다 한다.

증승정원주서 사상(史商)의 아들이었던 그는 경종 장인인 부원군 어유구(有龜)의 사촌동생이기도 했다. 이처럼 그가 외척에 속해 있었고 출사해 있던 시기가 조선 역사상 그 어느 때 보다 정쟁이 심했던 때였던 점을 감안하면 그저 순탄한 벼슬길에 올라 선정을 펼칠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실제 그랬다. 숙종의 후비 장희빈의 소생이었던 경종이 소론 후원을 받아 왕위를 계승, 재위 4년 동안 왕세제 연잉군(경종의 이복동생으로 후에 영조)을 지지하는 노론은 탄압받게 된다. 더구나 부원군이자 어영 훈련대장을 지내면서도 노론을 적극 옹호해 사위 경종의 집권연장을 막았던 어유구였다. 그런 만큼 그와 혈연적으로 맺어져있던 어유룡은 격랑의 시대흐름에 원하든 원치 않든 빨려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유룡은 1710년(숙종36) 사마시에 합격하고 171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면서 일단 순탄한 벼슬길에 나선다. 1717년 이후 정언·수찬·지평을 역임했고 경종 즉위 후에도 지평·헌납·장령·사간 등 양사의 벼슬을 역임했다. 당시 조정에 나가 있었던 고관들이었다면 피해갈 수 없었던 정쟁에 휘말린 것은 경종 즉위 직후에 일어난 신임사화 때부터였다.

이 사건은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싼 노론과 소론사이의 당파싸움에서 소론이 노론을 역모로 몰아 소론이 실권을 잡은 사화였다. 노론은 연잉군(후에 영조)을 지지했다. 숙종이 죽고 뒤를 이은 경종은 성격이 온후했으나 자식이 없고 병이 많아 하루 속히 왕위 계승자를 정할 것을 건의한 이정소의 상소를 시발로 해 노론 4대신인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체 등이 왕세제(王世弟) 책봉을 주장했다. 이 주장이 관철돼 1721년 연잉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게 되자 소론은 시기상조론을 들어 그 부당함을 상소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노론측에서는 왕세제를 정한 지 2달 뒤인 10월에 상소를 올려 세제청정(世弟聽政)을 요구했다. 이에 경종은 세제의 대리청정을 명하였다가 환수하기를 반복하였고 그에 따른 노론과 소론의 논쟁도 치열했다.

이와 같이 경종 질환을 이유로 경종 즉위년부터 세제책봉과 세제대리청정을 둘러싼 논쟁이 첨예화해 가는 가운데 소론에 대한 경종의 비호가 표면화되자 소론측이 노론 4대신을 들어 ‘왕권교체를 기도한 역모’라고 공격하는 소를 계기로 노론의 권력기반은 무너지고 소론정권으로 교체되는 환국이 단행됐다. 당시 이 사변에 의해 4대신이 사약을 받아 죽는 등 20여명이 처단됐으며 유배된 자가 114인에 이르는 등 연좌된 사람이 173명에 이르렀다.

당시 노론 입장에 있었던 어유룡은 대간으로 있으면서 1720년(경종1) 11월 2일, 박치원·이중협과 함께 왕세제(王世弟) 책봉을 반대하는 소론파의 처벌을 주장하고 ‘세재 대리청정’을 반대하는 좌의정 조태구 등을 탄핵했다. 머지않아 닥칠 신임사화의 불씨가 됐던 이 일에 그가 앞장 선 것이다. 이 일로 그는 두 사람과 함께 노론파의 3대 대간으로 불렸다. 정쟁의 한 가운데 휘말려 들었던 그는 결국 의금부에 붙잡혀 국문과 함께 영암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되니 1721∼2년에 걸쳐 일어난 신임사화 와중이었다.

신임사화의 참상을 몸소 겪은 영조는 탕평책을 실시하기도 했으나 당쟁은 근절되지 못한 채 점차 노론의 기반이 확고해졌고 어유룡 역시 다시 벼슬길에 올랐다. 1725년(영조 1) 사간·집의 등을 거쳐 광주 부윤·황해감사를 지냈던 것이다.

하지만 늘 정쟁이 있던 당시론 편안한 관직자리란 없었다. 어유룡은 1727년 정미환국으로 파직됐다. 영조 3년 1727년 4월 4일, 황해도 관찰사로 배명되었으나 7월 5일 다섯사람의 소(疏)와 관련해 그를 비롯한 101명이 직에서 파면됐고 그는 광주군 진위 농가로 귀향했다.

그러던 중 다음해인 1728년(영조 4년), 이인좌 등이 밀풍군(密豊君·소현세자의 증손)을 추대해 난을 일으키니 무신정변 또는 이인좌의 난 이라 부른다. 어유룡은 병조참지로 제수돼 난을 진압하는 임무를 띠게 되었지만 이광좌(李光佐)를 성토했다가 그에 의해 탄핵돼 다시 강원도 유배길을 떠나게 됐다. 또 한번의 파직을 거쳐 1730년 복직된 그는 승지·강원감사·안동부사 등을 거쳐 대사간에 이르렀고 1744년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1748년 한성부좌윤을 거쳐 1754년 지중추부사로 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 및 예우를 위해 설치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그는 이어 1756년 정헌대부로 진급돼 가을에 숭정대부가 됐고 1761년(영조 37년)엔 다시 판돈령부사에 제수되어 이태 후 보국숭록대부에 승진됐다.

영조 집권 후반기로 가면서 점차 노론의 집권이 안정될 때 그는 1764년(영조 40) 세상을 떠나니 향년 87세로 수를 누렸다. 그의 묘는 광주군 봉헌면 정개산 북쪽에 있었으나 1996년 3월 용인시 구성면 언남리 중간촌에 천묘했다.

신도비문에 따르면 그는 평시에 몹시 덥더라도 관건을 벗지 않았고 매일 새벽에 일어나 빗질하고 의관을 바르게 했으며 술과 장기, 바둑을 멀리했다. 집안살림은 다스리지 않았으며 (재산증식에 뜻이 없음을 말함) 효도와 우애는 천성적으로 타고 나 크고 작은 제사는 팔순이 넘도록 직접 행사했고 의지할 때 없는 외척을 모두 집으로 오게 했다. 동생 유기가 일찍 돌아가 조카 석문을 자기 아들처럼 여겼고 형제들, 유성, 유화와는 70이 넘도록 한 울타리 안에서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마주 대하며 즐거워했다고 전해진다. 종족끼리도 매우 화목해 녹봉이 비록 적을 지라도 반드시 나누어주며 “이 녹봉은 선조님들이 베풀어주신 음덕인데 내 어찌 혼자서 누릴 수 있겠는가”하며 먼 친척에게까지 베풀었다 한다.

■자료제공: 박용익(전 용인문화원장)
■참고자료: 정헌공신도비문(靖憲公神道碑文),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정헌공(휘 어유룡)실록 초, 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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