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가 만나는 신갈인터체인지에서 서울방향으로 향하다 비상활주로 좌편으로 보면 길게 형성된 마을이 있다. 야트막한 산을 등지고 남북으로 길게 누운 가옥 앞으로 오리나무 숲이 우거진 이 곳이 구성면 보정4리, ‘이현’마을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동네에서 상현리로 넘어가는 고개에 황토진흙이 유독 많아 ‘진고개’였는데 이를 한자식을 표현해 ‘이현((泥峴)’이 됐다고 한다.

풍덕과 맞닿은 마을 북쪽에 점토 흙을 재료 삼아 항아리를 구웠던 가마터가 50여년 전까지 있었고 이곳을 ‘점말’로 불렸다는 점을 상기하면 자연조건과 토양적 특징이 어우러져 이 같은 지명을 만들어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데, 바로 마을 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이진산(夷陣山)과의 관계다. 임진왜란 당시 대단한 격전지 중의 하나로 전사에 기록돼 있는 곳이 오늘날의 이진산이었던 만큼 군사용어인‘陣’이 ‘질다(泥)’로 잘못 해석되고 이를 다시 한자식으로 표기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마을 형성시기는 대략 300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오랫동안 ‘문씨 동족촌’이라 할 만큼 남평 문씨(南平 文氏)가 대성을 이루고 살았는데 문택기(82)옹에 따르면 약 250여년 전 그의 8대조가 마을에 처음 입향했다고 하며 이들보다 먼저 터를 잡은 성씨는 경주 이씨(慶州 李氏)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경주 이씨들은 자손이 번성하지 못했고 대부분 이주해 현재 단 한집만이 있다. 문씨 역시 30여 년 전만 해도 30여 호를 웃돌았으나 현재 10호 정도에 불과하다.

#임진왜란 이진산 전투 있었던 곳

용인일대에선 비교적 너른 들판을 앞에 두고 있는 이곳은 먼 옛날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옛 문헌에 따르면 삼남대로(三南大路)의 관문이자 영호남 길목에 해당되는 곳이 이 일대였다.

결국 60년대 말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마을 앞에는 비상활주로까지 갖춘 고속도로가 생겼다.

이 마을에 얽힌 비극적인 역사도 따지고 보면 이 같은 지리적 환경과 결부돼 있다. 앞서 밝힌 것처럼 마을 뒷산에 해당하는 이진산은 임진왜란 당시 북상하던 왜군과 이를 방어하던 관군이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목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그런데 이 같은 사실이 확인된 것은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다. 몇 해 전까지 광교산 전투로만 알려졌을 뿐 이진산과 관련해선 ‘설’로만 남아 있었다.
이석현의 <임진왜란사>에 ‘용인전투가 북두문산과 문소산에서 이뤄졌다’는 기록을 두고 향토사학계 일부에선 그 위치에 대한 여러 주장이 오갔다.

그 중 수지지역 향토연구가인 이석순(56세·전 수지농협 전무)씨는 북두문산이 바로 ‘이진산’이라고 주장해왔는데 이는 몇 해전 대규모 택지개발에 따른 구제발굴 과정에서 사실로 확인됐다. 수지읍 사무소 정면 이진산에서 임진왜란 당시 사용됐던 전투유물이 다량 발견된 것이다. 하지만 이 역사적 현장은 택지개발로 인해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기름진 농지는 줄고 땅 값은 묶이고

이 마을을 덮쳤던 또 한번의 시련은 6.25 한국전쟁이었다. 1951년 겨울, 1·4후퇴 당시 피난민 속에 중공군이 위장하고 뒤섞여 있다고 판단한 미 공군기가 풍덕천 일대 죽전 대지, 감바위 등에서 가옥을 불태우고 피난민을 향해 기총소사를 퍼부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던 ‘풍덕천 미군기 오폭사건’당시 이현마을 역시 불행은 비켜가지 않았다. 당시 제2국민병으로 나가 전사한 문용기씨(당시 22세 정도) 가족 5명이 폭격으로 한꺼번에 죽는 등 인명피해와 함께 가옥 10여호가 불에 타기도 했다.

비록 때때로 국가적 재난 앞에 수도권 진입의 관문이라는 교통의 요충지로 인해 시련의 시절도 있었지만 소문난 기름진 농토가 마을 앞에 펼쳐져 있어 용인관내에선 부촌이었다. 마을 원로 문택기 옹 역시 구성에선 농지세를 가장 많이 낼 정도로 토지가 많았다. 한 때는 일꾼을 셋이나 두고 60여 마지기 돈에 쌀 200석 정도를 수확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그의 시름은 쌓여만 간다. 자유당 시절 토지개혁 바람에 7천여평을 넘겨줬던 그는 경부고속도로가 나면서 6천여평을 다시 도로부지로 내놓아야 했다. 군사시설로 인한 고도제한에 걸려 ‘수지맞았다’고 하는 요즘에도 인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토지가는 낮다.

그렇다고 농사를 계속 지을 수 있는 환경도 아니다. 최근 들어 용인서북부 인구가 폭증하자 고속도로 옆으로 왕복 6차선 규모의 도로신설이 계획돼 있어 아들집마저 헐리게 됐다. 그러니 그의 입장에선 최근 마을 주변의 빠른 변화가 달가울 리 없다.

#마을 숲, 영원한 상징으로 남길

주위환경의 급변을 마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 중 또 하나는 다양한 가옥 형태다. 전통적인 농가가 아직 주축을 이루고 있지만 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주거공간이 상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약 10여년 전부터 마을에 다가구 주택인 빌라가 들어섰다. 영남빌라, 조광빌라 등인데 당시론 새로운 주거형태로 마을 호수와 인구가 급속히 느는 계기가 됐지만 최근 새로운 주거형태의 등장에 따라 초라하고 왜소하기 그지없는 처지가 됐다. 고급 대형 아파트가 마을에 들어선 탓이다.

‘솔뫼마을’로 명명돼 요즘 한창 입주중인 현대 홈타운 아파트는 40평 대에서 60평 대까지로 고급소재를 썼을 뿐만 아니라 단지로 들어서는 순간 카드 입력을 해야만 통과하도록 돼 있어 또 하나의 다른 세상이나 마찬가지가 됐다.

이처럼 이질적 요소들이 뒤섞여 있는 마을에 그나마 전통마을의 옛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마을 숲이다. 남동쪽으로 200여 미터 가량 줄지어 서 있는 오리나무 마을 숲은 약 120년 전 문택기옹의 조부, 문재순이 심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물론 이현 마을의 마을 숲은 풍수적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조성한 비보 숲의 한 형태다. 비보 숲이 다양한 목적과 기능으로 조성되지만 이현 마을 숲은 허한 곳을 보충하고 바람을 갈무리하는 비보의 풍수적 기능이 강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리적 위치로 말미암아 그 어느 곳보다 역사적 풍파를 심하게 맞았고 또 빠르게 변해가는 이현 마을. 그나마 예스러움과 선대들의 숨결을 간직하고 있는 마을 숲이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 있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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