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김씨 경기도 회장 김홍렬


경주 김씨 용인시 종친회장 10년 연임, 경주 김씨 경기도 회장, 문간공(십청헌)파 대지종회장... 그에겐 종중과 관련, 회장 직책만 여덟 개다. 경주 숭혜전 보존회 등 중앙직책까지 치면 더욱 늘어난다. 생각하기에 따라선 감투를 꽤나 좋아하는 사람으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를 아는 종회원들의 생각은 정반대다. 그 만큼 종사(宗事)에 열심인 이는 드물다는 것.

경기권역에 살고 있으면서 종회에 관심이 있는 경주 김씨라면 누구나 다 아는 종중의 파수꾼 김홍렬 옹(79).

그는 20여년 동안 마치 조상과 관련된 일에 자신의 삶을 건 듯이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문중과 관련된 유적은 말할 것도 없고 족보나 자료를 통해 새로 확인된 곳은 꼭 찾아가 현장을 확인했다. 그러다 보니 문중 내력에 대해선 ‘박사’다.

그가 회장을 맡고 있는 동안 조상들의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위해 지은 재실(齋室)만 해도 3개에 이른다. 수지 대지에 있는 ‘십청헌(김세필) 재실’, 상촌공(김자수) 재실, 1998년에 마련한 와운정사(臥雲精舍, 김저)가 그것이다.

#김세필 묘역 문화재 지정에 보람

특히 죽전 일대가 택지개발지구에 수용됐으면서도 선영이 그대로 보존하게 된 것도 김옹이 신발 닳도록 뛰어 다닌 결과였다. 그는 선대 분묘가 대부분 이장 위기에 놓이자, 보호대책의 하나로 서둘러 경기지방문화재 지정을 추진했다. 문화재 지정과 관련된 보호위원회 위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선대 명현들의 위업과 석물의 문화재적 가치를 설명하고 호소했다.

김옹의 이 같은 노력은 마침내 받아들여졌다.
지난 1999년 4월, 수지읍 죽전 산 23번지 일대 십청헌 김세필 선생의 묘소를 경기도 문화재 제92호로 지정하고 그 명칭을 문간공 김세필 묘역 일원으로서 국가관리문화재로 영구 보전토록 한 것이다.

김옹이 이처럼 조상 섬기기에 열심인 것은 아버지 죽헌(竹軒) 김명호(1887∼1969)선생의 영향이 컸다. 선친 죽헌 선생은 조선 고종때 태어나 한일늑약을 거치며 울분을 참지 못해 청운의 꿈을 접고 조상 대대로 전승해온 미풍양속을 수호하며 용인·광주 일대 유림의 큰 별로 알려진 분.

특히 그는 기로시회(耆老詩會)라는 문학모임을 조직해 지역사회 발전상과 인간 삶을 한시로 노래한 문사이기도 했다.

죽헌선생은 서구의 배금사상이 걷잡을 수 없이 만연되자 전통문화의 급속한 추락을 애석하게 생각해 자신의 생각과 전통의 얼을 담배 ‘금박이’속종이에 까지 깨알같이 적었다. 그 육필이 지금은 죽헌집으로 묶여 내려오고 있기도 하다.

# 아버지 죽헌 선생이 삶의 이정표

“용인향교 전교를 오래하셨던 선친께서 종사와 관련된 외출을 하시면 어린 나를 데리고 다니셨지. 향교를 다니실 때도 마찬가지고. 늘 책을 대하시고 틈만 나면 한시를 즐기셨던 선친으로부터 숭조(崇祖)에 대한 중요성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었나 봐.”

그래서 그는 선대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숭조목족(崇祖睦族)’이란 글귀를 가훈처럼 여긴다. “‘조상을 숭상하고 일가간에 화목한다’는 이 말은 절대 배타적인 것이 아냐. 내 가정, 내 일가로부터 화목해야 지역사회, 나아가서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하는 것 아니겠어. 또 내 조상을 섬기고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 내 조상의 뿌리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은 그야말로 근본을 모르는 것이나 다름없지.”

그가 태어난 수지읍 죽전리 대지 와막골은 경주 김씨의 집성촌이었다. 마을 둘레가 종중산이자 선대 세장지인 관계로 그의 어린시절 놀이터는 선대들의 묘였다. 조선조의 충신계보를 잇는 상촌공 자수, 공평공 영유, 기묘사화에 얽힌 명현 십청헌 세필, 을사 사화때 사사(賜死)된 저에 이르기까지 즐비한 선대 명현들의 숨결을 느끼며 자란 그는 20대가 되면서 김량장동으로 이사를 했다. 군농회(현 농협의 전신)에서 기수보를 일했던 그에게 당시 용인읍장이던 신현정씨가 공무원을 권해 ‘면서기’로 일했다.

# “조상을 알아야 무겁게 살게 돼”


해방이 되면서부터는 다시 경찰에 투신, 어지러운 해방정국과 한국전쟁 그리고 자유당 독재정권이 무너지기까지 소용돌이치는 현대사의 현장에 서 있기도 했다. 그가 경찰을 그만둔 것은 4.19혁명이 난 직후였다. 어지러운 세상사를 멀리하고 싶은 마음에 사기업에 들어가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기도 했지만 이미 지역사회에서 닦아놓은 위상으로 말미암아 의회기능이 부활되기 전까지 용인시 자문의원으로 지역사회에서 많은 일을 했다.

이제 이병순 여사(79)와 결혼한 지 60년이 돼 회혼까지 맞은 김옹은 대부분의 종사 일에서 서서히 손을 떼고 있지만 마음은 편치 않다. 죽전 대지 일대가 택지지구로 개발되면서 많은 선산이 훼손된 것이 마치 자신의 탓인 것 같아 “조상 뵐 면목이 없다”고 말한다. 핵가족화와 가치관의 변화, 그리고 또 다른 여러 이유로 조상을 섬기고, 근본 찾기에 소홀한 우리 젊은 세대들에게 김옹의 마지막 한 마디는 왠지 예사롭게 들리질 않는다.

“뿌리를 알아야 예의도 알고, 고마움도 알고, 서로 사랑할 줄도 알지. 조상을 생각하면 무엇보다 행동거지가 경솔해지지 않고 무겁게 살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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