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광의 본명은 이홍해(李弘海)였으며 이홍규(李弘奎), 이의산(李義山) 등의 이름을 쓰기도 했다. ‘홍광’의 이름을 쓴 것은 후일 민족운동에 투신하면서부터였다. 중국에서 간행된 전기물에 의하면 1910년 용인군 ‘단삼동(丹參洞)’에서 빈농 이보경의 아들로 태어난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단삼동이란 지명은 예나 지금이나 없고 경기대 최홍규 교수와 중국 길림성 에 살았던 용인출신 이종학(79)씨에 따르면 ‘이동면’출신인 것으로 보인다.

그가 태어났을 때 집이 가난했다고 하지만 조부 이상준은 학식이 있어 이홍광의 교육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다. 매우 어려운 생활 가운데도 부친 이보경은 이홍광이 10세때인 1919년, 보통학교(현 초등학교)를 보냈다. 하지만 그는 학교를 1년밖에 다니질 못했다. 학교에서 일본 경찰관의 아들이 한국인 아이를 때리는 것을 보고 격분해 일본 학생을 때린 결과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 때 그의 아버지도 1주일 가량 구류당하고 풀려났지만 일경의 감시를 받는 입장에 처하게 됐다. 남달리 총명하고 정의감이 강한 그는 아버지를 도와 힘겨운 농사일을 도우며 할아버지로부터 한문과 경서 등을 배워 상당한 소양을 갖추는 한편 일본어도 배워 꽤 유창하게 말할 수 있었다.


17세부터 중국 길림에서 항일운동

이홍광이 부모를 따라 중국길림성으로 이주한 것은 1925년이었다. 일제의 억압과 어려운 경제생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이주였지만 그곳의 생활이라고 낫지는 않았다. 길림성 반석현(磐石縣) 일대는 중남부 지방 출신 한인농민들이 많이 이주해 살았는데, 이곳은 평야지대가 넓어 논동사를 짓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남만지역 한인들은 연변지역과는 달리 중국 국적이 없으면 전혀 토지소유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중국인 지주나 귀화 한인 지주 밑에서 소작농 또는 고용농민으로 봉건적 수탈을 받으며 삶을 영위해 갔다.

더구나 당시는 중국동북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장작림(張作霖) 군벌정권이 한인들에 대한 박해정책을 시행하고 있던 때여서 그 어려움은 더욱 컸다. 1930년초 반석현은 조선족 호수가 1천여호, 인구는 5천 여명이나 되었으며 전체인구의 10%밖에 되지 않았지만 항일유격근거지의 핵심역할을 했다. 이홍광은 이처럼 일찍부터 일제의 탄압과 수탈, 그리고 부패한 군벌정권의 박해와 지주-소작관계의 모순에서 초래된 고통 체험으로 인해 정서 및 신념체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홍광의 활동은 만 17세 되던 1927년부터 시작됐다.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영향력 아래 있던 ‘재만농민동맹’에 가입해 농민운동에 동참한 것이다. 그가 중국공산당 계열 운동을 한 것은 1920년대 후반부터 동만(東滿)과 남만(南滿)지방에서 민족주의 계열 민족해방운동이 점차 쇠퇴한 반면, 사회주의 계열 민족운동이 성장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 무렵부터 본격적인 사상서적을 탐독하고 대중운동에 동참하는 한편 중국어를 습득해 항일무장투쟁의 밑바탕을 쌓아간다.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참모장

이홍광은 1930년 말경 이통현 삼도구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는 그 때부터 수십명으로 구성된 ‘노동적위대’를 조직한 뒤 쌍량현 대정자의 친일분자이며 악질 지주인 장구진 부자를 응징해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반일회와 농민회 등 단체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조직하고 지주의 가혹한 지대 및 현물 수취해 벌인 농민들의‘추수투쟁’에도 적극 가담한다. 20대 초반의 어린나이에 역량있는 활동가로 지목됐던 이홍광은 한일청년 7명으로 구성된 ‘적위대(일명 打拘隊·개잡이대)’의 대장으로 활동하며 이름을 넓혀 갔다.

이 조직은 한인 밀정 및 만주국 관헌, 일본 군경 등을 대상으로 투쟁하는 조직으로 남만지역에서 중공당이 이끄는 첫 무장조직으로 기록돼 있다. 그 후 반석 의용군, 남만유격대 등의 주요 간부로 항일 전선에서 활약하던 그는 동북인민혁명군에 이르러 그의 활동은 절정에 달한다.

1933년 일제의 중국동북 침략과 괴로 만주국(1932년 3월) 수립으로 변화된 정세하에서 당은 소비에트 정권을 세울 것을 당초 요구했지만 그는 계급모순 보단 민족모순의 척결을 우선시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이에 따라 당의 입장 변화 요구를 관철시켜 일제 침략에 항거하는 광범한 항일운동세력과 연대해 조직한 것이 ‘연합참모처’였다. 여기에 참가한 부대는 3000여명에 달했으며 그는 참모장에 선출됐다. 이어 중공당 반석현위와 남만 유격대는 항일투쟁이 점차 격화되고 유격대의 역량이 성숙함에 따라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를 정식 조직했다. 이 무장세력은 중국동북에서 가장 먼저 결성된 중공당 계통의 정규군인 셈이다. 이홍광은 여기서도 역시 참모장을 맡았다.

1935년초까지 반석 남부와 압록강 상류 건너편 일대에서 일제와 투쟁하고 있던 이홍광은 국내 대중들에게 자신들의 활약을 선전하기 위해 국내 진공작전을 세웠다. 그 대상지는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이 선정됐다. 이 곳은 일제 국경경비 및 만주 침략의 거점이 되는 군사요충지였다. 이홍광 부대가 주도한 동흥 습격전투는 의도했던 것 이상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왔다. 이 사건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몇 일간 대서특필됐고 중국 동북에서 발행되는 ‘대동보’등 신문에도 크게 보도됐다.

1920년대 초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많은 민족운동 단체들에 의해 수많은 국내 진입투쟁이 있었지만 동흥습격 사건은 만주국 수립 이후 대규모 병력이 진공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을 만 했다. 당시 신문들은 이홍광의 이름과 월경(越境)부대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고 나중에야 그 정체를 알게 됐다.


“이홍광은 여장군이다”

중국내 조선족의 민족출판사가 펴낸 ‘봉화’에 의하면 당시 금성철벽이라고 떠벌리던 동흥읍이 이홍광부대에 타격을 당한 후 한때 “이홍광은 여장군이다”라는 소문이 널리 퍼지기도 했다고 한다. 사연은 이렇다. 당시 생포한 일본군과 그 주구 16명을 심문하던 20대 초반의 여간부가 일부로 “내가 이홍광”이라고 했던 것.

그런 가운데 이홍광은 더욱 활기찬 투쟁을 벌여 나갔다. 1935년 5월 일본인이 경영하던 목재소를 습격해 80여필의 말을 노획해 남만의 신빈현과 항인현의 경계지점인 노령을 지나다가 200여명의 일만군 (日滿軍) 연합부대와 조우했던 것이다. 그는 이 전투를 지휘하다 총격을 받고 쓰러져 후송됐으나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는 불과 25세였다.

이홍광, 그는 우리에게 생소한 인물이었으나 중국동북지방과 북한에서조차 지명도가 높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우선 그는 몇 안 되는 남한 출신 항일빨치산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으며 남만주 지방에서는 거의 최초인 1930년대 초 항일유격대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용인이 낳은 커다란 인물인 이홍광에 대해 이제부터라도 이념적 색채보단 민족해방항일투사라는 관점에서 보다 많은 관심과 인물연구가 돼야 할 것이다.

□참고자료: <장세윤(성균관대 교수), 연구논문 「이홍광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8집>
<봉화편집위원회,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3 봉화」 중국 조선 민족출판사, 1989>

□도움주신 분들: 박용익 (용인향지모 회장), 김명섭 (강남대/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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