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에서 깊은 골이라 할 만한 곳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과거 ‘오지’라고 불리던 곳도 대부분 산자락을 자르고 관통 도로가 생겨 사람들의 때가 묻지 않은 곳은 그리 많지 않다. 이제 남은 곳이라곤 한반도 산맥 본 줄기 중 하나인 한남정맥의 몇몇 골짜기가 아닐까 싶다. 수 천년을 흘러온 물길도, 장비를 앞세운 인간의 힘도, 감히 뚫을 수 없는 막다른 깊은 계곡.

우리고장에서 굳이 그런 곳을 하나 찾아보라면 금어리 쇠내실에서 퉁점에 이르는 골짜기라고 생각한다.

“용인에서 동북쪽에 보이는 길고 높은 산릉이 광주산맥이다. 그 중 중절모같이 생긴 산이 광주의 태화산인데 태화산 북쪽에 뾰족한 삼각형 산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높이나 품은 태화산에 손색이 없는 이 산이 용인시에서 제일 높은 말아가리산이다.”

이제학씨가 「용인의 산수이야기」에서 밝힌 것처럼 용인 최고봉임에도 지도에서조차 이름 없는 봉우리로 남아있는 말아가리산, 그 밑자락에 형성된 마을이 바로 금어2리, 쇠내실과 퉁점이다.

쇠내실 지명 유래에 대해선 두가지 설이 있다. 마을주민 최규남씨(71)는 작은 하천인 ‘소내’(小川)의 변음으로 생각해 ‘경안천 상류를 형성하는 실개천이 흐르는 마을’이라고 주장한다. 또 하나는 ‘쇠(金·鐵)’와 관련된 풀이다. 옛 기록에서부터 최근 이인영 문화원장이 엮은 「내고장 용인 지명·지지」에 이르기까지 쇠내(金川)가 흘러서 쇠내실이라 하고 제철이나 동기를 주조하던 공방이나 이와 관련된 산업에서 생긴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이런 판단을 더욱 부추기는 것은 윗동네 퉁점(銅店)이란 마을이 놋그릇을 만들던 곳이어서 생긴 지명이란 점을 그 근거로 삼고 있다.


영양 천씨가 먼저 입향

그러나 퉁점조차 동점(銅店)보단 독점(篤店)의 변음가능성이 높다. 이 마을 작은 골짜기 이름 중에 ‘독점 밭’이 있다. 이 곳에선 아직도 겹겹이 쌓인 깨진 그릇 조각이 쏟아지고 있다. 반면 노인들에 의하면 쇠와 관련된 얘기를 선대들로부터 듣거나 그 흔적을 본적이 없다고 한다. 쇠내실 역시 작다거나 금붙이와 관련된 지명보단 지형을 근거로 삼아 ‘사이에 내가 흐르는 마을’이란 뜻에서 유래됐을 것으로 본다. 즉 ‘쇠’는 ‘사이(間)’의 의미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국에 많이 분포돼 있는 ‘쇠내’나 ‘금곡’이란 지명이 대부분 ‘쇠’와는 전혀 관계가 없이 ‘새(新)’나 ‘사이’에서 비롯된 것이란 조사 자료가 있는데다가, 특히 마을의 지형 특성을 볼 때 그렇다. 쇠내실은 말아가리산 줄기를 따라 북동쪽에서 남서방향으로 물줄기가 흐르고 있고 이를 중심으로 마을이 양편에 들어 서 있음을 상기하면 더욱 심증은 굳어진다.

이 마을에 가장 먼저 입향한 이들은 영양 천씨(潁陽 千氏)로 알려져 있다. 수백년 전의 조상 묘가 있긴 하지만 동족촌을 형성하진 못하고 주민 구성은 각성으로 이뤄져 있다.

여기에는 마을의 입지조건과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앞뒤로 험준하고 비좁은 산골인지라 비옥한 농토가 거의 없는 주민들은 새마을 운동이 본격화되기 전인 60년대까지 산판 일과 화전이 주요 생계수단이었다. 숯을 굽고 땔감나무를 해 읍내에 내다 파는 한편 왠만한 산등성은 화전을 일궈 보리나 조를 심어 양식으로 삼았다. 생활이 안정되지 않았던 주민들은 자연스럽게 이동이 심했던 것이다.


60년대까지 화전 일궈

화전을 일구던 땅이 많았던 만큼 작은 지명은 땅 번지를 대신할 만큼 많다. 산림을 개간 한 만큼 땅 번지가 따로 없었던 과거엔 막 가는 골, 첫 가는 골, 둘째가는 골, 큰골, 작은 골 등이 누구네 경작지를 대신 부르는 이름이 됐던 것이다.

그러나 근래 들어 마을은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농사에는 악조건인 자연환경을 오히려 활용하는 주민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금어 2리는 최근 들어 표고버섯 재배와 가축 사육이 가장 많은 마을로 변모해 가고 있다. 일조량이 부족하고 그늘이 많은 대다 풍부한 참나무 목재와 물은 오히려 표고버섯을 재배하는데 가장 좋은 조건을 마련해 주고 있다. 또 사람들의 이동량이 많지 않은 이곳은 가축을 사육하는데도 안성마춤이다. 꽃사슴과 앨크로 불리는 짐승을 기르는 목장이 대여섯 군데에 이른다. 대낮인데도 녹용 등 보신용 한약재를 구입하려는 외지인들이 버스를 대절해 올 정도로 성업 중이다.

근래들어 주민들의 구성도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수 십리 길을 걸어 학교를 다니고 조밥으로 끼니를 때우던 주민들은 많이 마을을 떠난 만면 퇴직 후 전원 생활을 즐기려는 외지인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4년여 전에 지어진 퉁점의 ‘무지개마을’로 명명된 전원 주택단지가 있고 계곡산장 인근에도 여덟 호 정도의 전원주택지가 형성돼 있다.

깊은 골임에도 자연에 순응하며 살던 주민들은 자연재해를 모르고 살았다. 그러나 지난 해 장마가 닥쳤을 때 용인에서 가장 피해가 컸던 곳 중 하나가 이 마을이다. 워낙 계곡이 깊은 반면 하천이 좁고 물살이 빠르기도 했지만 험한 산에 임도를 낸 것이 가장 큰 화근이었다. 벌겋게 산림을 파 헤쳐놓고 채 착근하지 못한 숲 사이로 홍수가 지면서 마을은 수마로 뒤덮였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하천 지형이 바뀔 정도로 피해가 적지 않았다.


열린 가슴을 지닌 사람들

조용하고 세상을 등진 듯이 살았던 이 마을이 또 한번 소용돌이 쳤던 것은 소각장이 금어리에 들어오면서 생겼다. 지난 93년, 금어1리 어매실에 쓰레기 매립장과 소각장 설치계획이 발표되면서 불붙기 시작한 주민과 시와의 싸움은 주민복지를 담보로 한 대타협으로 일단락 됐다.

주민들에게 주어진 돈은 10억원. 주민들은 공동자산을 관리하고 운용하는 ‘위원회’를 만들어 장고 끝에 땅을 사고 창고를 지어 임대사업을 벌여 나갔다. 하지만 경험과 경영기법이 미숙할 수밖에 없던 주민들은 소득에 대한 부푼 꿈은 날아가고 실망과 낙담으로 변하고 말았다. 용도변경과 각종 세금으로 농협 돈까지 빌려쓴데다가 창고 임대 사업 또한 신통치 않았던 것이다. 최근에 다시 2기 소각시설 건설계획이 세워지면서 주민들은 추가 도로 포장, 마을회관 준공, 상·하수도 설치 등 주민복지와 관련된 지원을 약속받은 상태로 알려지고 있다.

공기와 물이 좋아 예로부터 장수마을로 알려졌던 쇠내실과 퉁점. 독특하게 마을 인정만큼은 조금도 훼손되지 않았다. 주민 대소사에 힘을 합치는 것은 물론 유입주민에 대해서도 전혀 텃세가 없는 곳이 이 마을이다. 대부분 대동계를 원주민 중심으로 묶는 반면 이 마을은 주민전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닫힌 자연 환경 속에서 누대에 걸쳐 어려운 삶을 살아오고 있지만 어느 곳보다 열린 가슴을 지닌 주민들의 마을이 바로 쇠내실과 퉁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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