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대하면 마치 수줍을 소년을 보는 듯하다. 나이 ‘여든’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홍조띤 얼굴과 단아한 체구에 말투마저 찬찬하고 부드럽다. “나 같은 시골 노인네가 뭐 취재 대상이 된다고, 그만두지요 뭐…”하시지만 찾아간 사람을 내치진 않는다. 일제 말엽, 농협 전신인 금융조합 서기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화성농협 상무로 33년간 한길을 걸은 이영희 옹(80·모현면 초부3리). 정년퇴임 후 용인향교 활동을 시작해 전교까지 지내고 이젠 조용히 노후를 보내고 있는 그는 어찌보면 그리 특별한 이력의 소유자가 아니다.

하지만 태어나자마자 백부댁으로 양자를 가 양부모를 극진히 모시고 이젠 장남의 봉양을 받고 있는 그는 가정화목과 효친으로부터 모든 실천의 기본을 삼았던 긍정적 유교가치를 실천하고 있는 전형에 다름 아니다. 뿐만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언제든 뛰어들어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기여하고자 애쓰고 그러면서도 진퇴를 분명히 하는 참 어른이다.

그는 용인에 자리잡은 선대로부터 수 백년째 고향을 지키고 있는 토박이다. 마을 고향 이름을 따 자신의 호를 부계(芙溪)로 한 이옹은 모현면 능골에 잠들어 있는 연안 이씨 이석형(1415∼1477)의 후예로 능원리, 초부리, 갈담리와 양지면 추계리에 세거하고 있는 용인의 대표적 세족 가문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던 백부 병린에게 태어나자마자 입양케 해 양부 슬하에서 자랐지만 성장과정은 유복했다.

다만 그에게 신식 교육을 받을 기회는 남보다 늦게 찾아왔다. 유년기 집안어른에게서 한문을 수학했던 그에게 조부는 “일본교육을 받아 무엇에 쓰려 하느냐”며 학교에 보내질 않았던 것. 얼추 열 서너 살이 되서야 모현보통공립학교에 입학했다. 4년제였던 관계로 용인심상소학교(용인초등학교 전신)에 편입, 졸업을 할 수 있었다.


남보다 늦게 배운 신식교육

“더 좋은 학교를 가고 싶었지. 그런데 워낙 학교를 늦게 보내는 바람에 나이 제한에 걸려 갈 수가 없었어요.”서울 흑석동에 있는 중앙보육전문학교(중앙대 전신) 부설로 있던 경성상공실무학교를 다니게 됨으로써 그의 진로는 결정된거나 다름없었다. 1944년 일제 말엽, 졸업하자마자 광주금융조합(농협 전신)에 취업하면서 양주와 포천, 화성 등 경기일원 농협을 두루 거쳐 오산지부장을 마지막으로 1977년 정년 퇴임했다.

고향에서 다각적인 경영으로 농촌경제의 부흥을 꾀하는 한편으로 이옹이 유림과 단단한 인연을 맺은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선대로부터 엄격한 유교적 가풍이 내려와 자연스레 몸에 배어 있었던 것 같애요. 백부셨던 양아버지가 약관 만 15세에 돌아가셨으니 양어머니 전주이씨는 자식도 없는 터에 얼마든지 다른 길이 있었을 거요, 그렇지만 시댁을 떠나지 않았어요. 오히려 기다렸다가 1922년 내가 태어나자 성심 성의껏 양육하시고 또 내 슬하에 5남매를 두니 이 아이들까지 사랑과 의리로 교육에 힘써 가문을 훌륭히 보전했지요.”

전통윤리인 조상 섬김과 효친에 바탕을 둔 집안에서 만고의 열녀라고 칭송이 자자했던 양어머니의 효열을 보며 인의, 예지, 믿음에 바탕을 둔 향교와 서원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특히 그가 전념한 것은 향교 일이다. “조선시대 중앙교육기관으로 성균관이 있었다면 각 지방 공립 중등교육기관으론 향교가 있었죠. 공자를 비롯한 중국 성현과 우리나라 명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기도 한 향교는 지역 유지들이 교유하는 장소로도 사용됐고요. 향교는 유학 경전을 중심으로 교육하던 곳이어서 지역 유림의 총본산으로서 구실도 하고 있는데죠.”


전교당시 행한 세가지 일화

요즘 젊은 세대들은 유학의 논리나 향교의 기능에 대해 그리 관심을 두는 이들이 많지 않다며 열심히 설명하는 모습에는 젊은 세대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그가 마침내 향교의 어른격인 전교에 선출된 것은 1990년 1월. 그는 재임기간 동안 어느 누구보다 깊은 인상을 회원들에게 남겼다. “향교에선 삭망(음력 초하루와 보름)때면 정전에 나가 분향을 하도록 돼 있어요. 그 분이 재임하던 2년동안 단 한번도 거르지 않고 몸소 예를 갖췄지요. 그렇게 정성을 다 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지요”현재 용인향교 전교를 맡고 있는 정영재씨(70)의 얘기다.

또 하나는 교육기금 종자돈을 만든 일화다. 이옹이 전교를 할 당시 고희를 맞았다. 효자·효녀로 이름난 다섯 자녀들은 고희연을 준비하기 시작했지만 그는 한사코 말렸다. 자녀와 주위 사람들에게 번거로움과 부담을 피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다른 뜻이 있었다. 자녀들이 준비한 경비 200만원을 선뜻 향교에서 새싹들을 위한 교육기금 종자돈으로 내놨다. 이를 바탕으로 주위의 뜻이 더 모아져 현재 3천여만원의 적지 않은 기금이 조성됐다.

사리판단이 분명하고 견결한 삶의 자세를 읽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례. 1973년 양어머니께서 돌아가시자 인근에선 18세에 청상이 돼 정절은 물론 시부모께 효도함과 양자를 정성으로 양육해 가계를 이음이 만고에 드믄 열녀라고 칭송이 자자했다. 양어머니의 음덕을 기리기 위한 절차가 진행됐다. 모현면 유도회에서 양어머니의 효열을 향교에 건의했고 향교에서는 성균관에 알려 적극 동의를 얻어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전교 재임기간에 효열비를 세우도록 일정이 잡히자 이 일을 중단하고 뒤로 미루었다. 설령 온당한 일을 한다해도 직위를 이용한다는 구설에 오를 수도 있고 그럼으로써 순수하고 정당한 주위의 평가가 훼손될 수도 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결국 효열비는 임기가 끝난 뒤인 1994년 5월, 초부리 상부곡 마을 입구에 건립됐다.


“어른이 계신데 집 비울순 없죠”

이옹의 2남3녀 중 장남 경배씨(55)는 공학석사로 큰 회사의 중역으로 일하고 있다. 근무지는 서울이고 집도 마련돼 있지만 부계울 고향에서 출퇴근을 한다. 큰손녀 종현(고2)은 분당에 있는 학교가 다니지만 역시 불편을 감수하고 집에서 통학을 한다. 이유는 한가지다. “어른이 계신데 장남이 집을 비울 수 없죠. 윗 선대로부터 이어온 가풍이자 도리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자녀 교육에도 도움되는 게 많죠.”

조선왕조가 통치이념으로 삼아 무려 500여년 동안 도덕, 교육, 정치 등 제반분야에 걸쳐 가치관의 뼈대로 삼았던 유교문화. 우리가 추종했던 서구문명권에서 오히려 동양문화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소식과는 달리 요즘 젊은 세대들에겐 큰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가운데 이옹의 유교가치 옹호와 대를 잇는 조용한 실천은 어느새 ‘우리식 규범’에 멀리 벗어나 있는 자신을 뒤돌아보게 한다.

[사진은 최근 모습]
저작권자 © 용인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