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등문화 노인대학장 신형희 회장

용인문화원 별관에 가면 백발이 성성한 노인 한 분을 늘 만나게 된다. 주름진 얼굴이지만 건강한 혈색에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는 ‘여든 일곱’이라는 나이를 잊은 듯 자주 인터넷 세상에 빠져있다.

“요즘도 그렇지만 앞으로 PC를 다룰 줄 모르면 사회에서 뒤쳐지는 건 물론이고 자녀들에게 무시당해요. 어른 위치를 지키기 위해선 노인들도 배워야 합니다.”

젊은이 못지 않게 빠르게 자판기를 두드리고 인터넷 검색도 별 어려움 없이 하는 그는 신영희 옹이다. 명함에 새겨진 ‘구세군 은퇴사관 참령’‘한등문화노인대학장’‘대한노인회 경기도 연합회 자문위원’‘(사)한국복지정보통신협의회 용인지회장’이라는 경력과 현재 직함에서 확인되듯 신옹은 구세군 사관을 은퇴하고 현재 지역에서 노인들의 재교육과 정보화 마인드를 전파하고 있는, 노인사회의 왕성한 활동가(?)다.

“얼마 전 정부 발표에 따르면 이미 우리도 고령화사회로 접어들었다고 해요. 대비도 없었지만 지금도 노인들을 위한 환경은 좋지 않아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에요. 노인들 자신의 마음자세죠.”

‘어른없는 사회’그리고 ‘대접받지 못하는 어른’은 핵가족화와 물질적 가치를 중시하는 시대흐름에 그 원인이 있긴 하지만 결국 노인들 스스로가 제대로 역할을 해야 회복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인터넷 검색도 척척

신옹이 한 첫 일은 최근 노인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게이트볼 동우회를 만든 것.

약 7년전 노인정과 사랑방 담배 연기 속에 앉아 있는 노인들을 밖으로 나오도록 하기 위해선 운동이 가장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게이트볼이다.

박용근·정창용씨 등과 함께 다섯명이 시 도움으로 마평동 공설운동장내에 게이트볼 장을 만들어 회원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하나 둘 게이트볼 운동에 재미를 들인 노인들이 많아지기 시작해 요즘에는 대부분 읍면동에 게이트볼장이 개설됐다.

동우회원들이 양적으로 늘어난 것뿐만 아니라 용인 노인들이 각종 전국 대회를 휩쓸고 있을 정도로 활성화된 바탕에는 그가 첫 회장을 맡아 불모지에 씨앗을 뿌린 탓이었다.

그 다음으로 추진한 것이 노인대학 신설. “노인들인 우리끼리 얘기를 나누다보면 생산적인 일은 젊은이들만이 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깊습니다. 노인들은 단순히 소비하는 계층이 아닙니다. 생산적인 역할을 얼마든지 찾아서 할 수 있어요.” 노인대학은 그래서 생각했다. 신옹은 준비없이 시작한 것이 아니라 경험을 쌓기 위해 스스로 노인대학을 2년이나 다녔다. 경기도에서 운영하는 곳과 서울 경북궁에서 연 곳에 다녀 자신감을 얻은 후 당시 군수를 찾아갔지만 흔쾌한 답변이 없었다. 나중에서야 대한노인회 용인지회 산하로 강좌와 학관을 마련했는데 지회에선 그에게 학장을 맡겼다.

하지만 시 지원이 되자 간섭이 심해져 결국 3년만에 사비를 들여 문화원내에 ‘한등문화노인대학’을 새로 개설했다. 어느새 6회째 졸업생을 배출하게 됐다. 특히 올해부턴 대관료를 받던 문화원이 오히려 매달 10만원씩 지원을 해주고 있어 한결 여유를 찾았다. 한편으로 신옹은 지난 98년부터 문화원 별관에 인터넷 교실을 마련해 벌써 34기에 걸쳐 2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상태다.

젊은 시절 건준위에 몸 담기도

그가 이처럼 노인을 위한 지역사회 봉사에 헌신하는 것은 독실한 신앙적 가정환경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황해도 평산이 고향인 그는 수만평의 토지를 가진 갑부의 자손이기도 했지만 아버지 신순일은 유명한 구세군 사관이었다. 일제시대 당시부터 이남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아버지를 좇아 19살 때 남하한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으라는 당부를 마다하고 정치활동과 사업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여운형 선생이 주도했던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동했어요. 어떤 사상운동이라는 의식은 없었고 해방된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데 뜻을 같이했기 때문이죠.”

점조직이었던 건준위에서 그가 한일은 서울역앞 이재민 구호소 책임자였다. 해방직후 혼란기에 집을 떠나 떠도는 수 백명에게 매일 밥과 잠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당시엔 일제가 남기고 간 ‘적산’도 적지 않아 고급주택을 어렵지 않게 손에 넣을 수도 있었지만 신앙적 양심으로 물리쳤다. 신옹은 또 사업에 손을 대기도 했다. 군대 납품을 위해 건빵공장을 세우고 생산설비는 물론 80여명에 이르는 여성근로자까지 구해놨지만 6.25전쟁이 나는 바람에 기계한번 돌려보지 못하고 망했다.

그 밖에도 언론계 등에서 잠시 일 했던 그는 결국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구세군 사관이 됐다. “사업에 실패한 것도 사관이 된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봅니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짧고도 담담하게 회고한다.


“아직도 할 일은 많다.”

은퇴 후인 23년전, 당시 도청에 근무하던 외동딸(신연화·00·현 가정복지상담소 소장)이 용인에 거주지를 마련하면서 용인과 인연을 맺은 신옹. 토박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책임을 지고 있던 직책에서 한 때 물러나 보기도 했던 그는 열 아홉에 결혼한 후 근 70여 년을 함께 해로하고 있는 이월해(81)여사와 고림동 24평형 아파트에서 검소하게 살고 있다.

아버지와 자신, 그리고 딸까지 3대가 구세군 사관으로 봉직할 정도로 깊은 신앙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신영희 옹. 주말을 빼 놓고는 아침 8시면 어김없이 문화원 별관으로 출근하는 그는 앞으로의 계획을 이렇게 밝힌다.

“용인에 뼈를 묻을 노인이니까, 나와 같이 나이든 이들을 위한 일거리를 찾아 건강이 허락하는 한 움직여야죠. 또 신앙인의 생활태도가 어떻다는 걸 여전히 보여주고 싶구요.”

신옹의 수줍은 듯 생기있는 미소와 또렷한 목소리, 그리고 끊임없이 일을 찾아 나서는 생활자세는 젊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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