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용구현의 진산(鎭山)으로 불렸던 석성산(보개산 또는 성산)은 지리적 위치상 용인의 중심부에 놓여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고장의 역사·문화·환경·신앙 등 삶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크고 작은 많은 마을이 그 거대한 산자락 구석구석에 자리를 틀고 있어 그 안에서 주민들이 살아간다. 구성면 중리 언목(彦木) 마을 역시 마찬가지다.


석성산을 동쪽에 이고 있는 언목은 밤나무가 많아 밤동산 또는 율동산이라고도 한다지만 좀 억지스러운 반면 주민들의 풀이가 더 그럴듯하다. 주민들은 언목을 ‘어은목(魚隱木)’의 변음으로 보고 있는데 ‘고기가 수풀 속에서 잠자는 형상’이라는 뜻으로 말한다. 실제 이 마을은 석성산 서쪽 줄기의 야산들에 의해 겹겹이 둘러싸여 있어 이와 같은 모양을 연상케 한다. 행정명으론 중1리에 해당하는 언목은 16세기 후반이래 형성돼 이 지역 유력가인 남양 홍씨(南陽 洪氏)의 집성촌과 선산이 있다. 현재는 8세대만이 남아 있지만 과거에는 동막의 청송 심씨, 내·외촌의 성주 이씨 등과 더불어 동백리와 중리 일대의 터줏대감으로 군림해왔던 대성(大姓)이다.


남양홍씨 집성촌으로 형성

석성산 정상 쪽에서 서북 방면으로 뻗은 산자락이 끝나는 지점의 야트막한 산허리에 남양 홍씨 사정시정공파 묘역이 자리하고 있고, 이 외에도 60여기의 남양 홍씨 묘들이 산재해 있다. 선산의 이름은 기록상으로는 나와 있지 않지만 가문에서는 기치봉으로 부른다. 이 시정공파는 소론과 노론간 당파싸움 당시에 세력이 밀려 수원의 파장동으로 옮겨왔는데, 몇 세대 후 이 곳 언목에 자리잡게 되었다. 이곳 묘역을 마련한 것은 홍하명이며, 그는 유명한 도승에 물어 산소를 정하였다 한다.

전해오는 일화에 의하면 도승은 묘자리를 찾고 있는 홍하명에게 “인근 청덕리의 이대장 묘와 언목중 택일해 보라”며 “청덕리 터는 대장은 나올 자리지만 손이 귀할 것이고 반면 언목 터는 대장은 못하지만 자손이 번성하리라”는 거였다. 홍하명은 후자를 택했고 예언대로 자손은 대대로 번성하고 있다고 한다.

이 묘원에는 위로부터 임진왜란 당시 선무공신인 홍제(洪霽)의 묘, 그의 증손자인 통정대부 어모장군 홍하창의 묘, 역시 홍제의 증손자인 삼도통제사 홍하명의 묘(1671년 안치), 그리고 홍하명의 장남과 3남의 묘가 처례로 안치돼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이 홍하명의 묘인데 묘 양쪽에 자리한 문관석은 높이 166㎝, 폭 55㎝로 규모뿐만 아니라 미소를 머금은 듯한 이목구비는 우아하면서도 대담하게 처리돼 매우 인상적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홍제(1553∼1635)라는 인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용인전투에서 공을 세운 인물이다. 1592년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신속히 북상해 서울을 함락시키자 이를 탈환하기 위해 전라도 관찰사 이광을 비롯한 삼남지방 수령들과 관군이 주축이 돼 서울로 진격 중이었다. 수지 임진산과 광교산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투혼을 발휘했지만 패배를 당해 서울탈환의 뜻을 미루지 않으면 안됐던 유명한 싸움이었다. 당시 홍제는 비변사랑청이라는 군관직에 있었고 권율장군 등이 이끈 수원방어에서 무공을 세웠으며, 그 공로로 <선무원종록공신> 3등에 책록되고 대호군을 역임했으며 1635년 사망 후 사복시정으로 추증됐다.


“공장수가 가구수보다 많아”

언목 마을은 많을 때도 25호 정도에 불과한 작은 마을이지만 택지지구 지정 이후 더욱 줄었다. 주민구성은 7할 가량이 남양 홍씨이고 나머지는 영월 엄씨, 김해 김씨 등이다. 그러나 이들 역시 남남은 아니다. 근래 들어온 주민들 말고는 여느 집성촌처럼 데릴사위 또는 처가 쪽에 옮겨와 사는 형태여서 대부분 성이 다른 외척들이다.

비좁은 땅이긴 해도 전통적인 생계수단은 역시 농사였다. 그마저도 천수답이 대부분이어서 가난을 대물림하며 살아왔다고 한다. 그러다가 해방 직후 동백저수지를 조성하고 향린동산 저수지가 생기면서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있게 됐다.

그런 전형적인 농촌마을에 큰 변화가 온 것은 중소규모 공장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80년대 초반부터다. 농업이 주 기반인 마을에 제조업체가 들어오면서 작은 마을 공동체는 많이 변했다. 11개 업체가 들어와 ‘공장수가 가구수 보다 많게 됐다’고 할 정도가 되자 보이지 않는 갈등과 전통적 공동체는 매우 약화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택지개발 계획에 따라 공장은 이미 모두 마을을 떠났다. 이들은 양지면 주북리에 집단 공업단지를 조성하고 집단 이주한 것이다.

마을에 있는 당차골과 허숫물골은 모두 석성산 골짜기다. 엄법골 고개와 박수고개는 여전히 마을과 마을을 잇는 주요 교통로다. 이들은 중리 내촌에서 백현과 청덕리를 거쳐 영남대로와 연결된다.


석성산 산신 모신 마을신앙

석성산과는 뗄래야 뗄수없는 관계인 언목 마을. “성산 밑에서 여적 의지하고 살았는데 앞으론 어디가 살지…”주민 홍재영(70)씨의 넋두리처럼 성산은 삶의 근거지 뿐만이 아니라 거의 신앙의 대상이기도 했다. 대부분 마을 신앙이 그렇듯 기본적으로 여러 신령등을 좌정시킴으로써 마을을 안정되게 하려고 애쓴다. 마을 주산에 마을 최고신인 산신을 모시고 마을 입구에 여러신을 모심으로써 마을은 사람만이 아니라 신령들도 함께 사는 공간이 된다. 이른바 상·하당신을 말하는데 여기서 마을 주산 내지는 진산(鎭山)에 모셔진 산신을 가리키고 상당신은 당연히 석성산이다. 언목 뿐만이 아니라 중리 대부분 마을이 함께 참여하는 산신제는 주민들에겐 대단히 큰 마을의례에 해당한다.

이른바 보개산 산신제가 그것인데 구성면 산 19-1번지 상 중턱 폭 30m 정도의 평지 노송주위에서 매년 음력 초에 치룬다. 1996년부터는 8월초로 옮겼는데 이마저도 동백지구 택지개발소식이 전해지면서 3년째 끊긴 상태다.

얼마후면 마을과 주거공간은 사라진다. 다만 용인의 진산이자 마을 주민들의 주산 구실을 했던 석성산 만은 영원히 그들의 추억을 담은 채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를담아 동백택지지구에 포함된 주민들은 얼마전 그들이 ‘의지’하며 살았던 주산의 이름을 따 ‘성산친목회’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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