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과 이천의 경계지점에 있는 양지면 식금리. 예로부터 그 지역은 오천장을 보러 다니는 등 생활권은 오히려 이천에 가까운 곳이다. 안병춘은 이곳 식금리에서 1920년 6월1일 아버지 성식(性植)과 어머니 이안전(李安全) 사이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나이 9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고 홀어머니와 함께 생활해야 하는 매우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야만 했다. 오로지 어머니와 단둘이 남게 된 모자는 안병춘이 7∼8세 되던 해 서울 영등포로 이사를 하게된다. 그 이유는 정확치 않다. 다만 그의 어머니 이안전의 친정이 영등포였다는 안덕균(60·안병춘의 아들)의 증언을 통해 볼 때 아버지의 사망 이후 더 이상 생활 근거가 없는 이곳을 등지고 어머니는 친정 근처로 갔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소년기를 서울로 보내게 된 안병춘은 18세 때인 1928년 3월, 영등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잠시 대총장유 양조장에 취직했으나 곧 해고되고 만다. 그 후 고학을 하면서 공립상업실습학교와 경성 기독교청년회학교 고등과 1부를 다녔으나 모두 중퇴하였다. 공립상업실습학교 재학 중에는 보성고등보통학교 급사일을 하면서 학비를 조달하였다.
그의 사상편력은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학관 고등과에 다니면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한 때 중앙기독교청년학교 고등과에서 배우며 나중 조선국내공작위원회 사건에 관련된 이중업(李重業), 김중원(金中源)의 지도를 받아 독서반을 조직해 활동하게 된 것이다. 보성고등보통학교 급사가 되어서도 같은 학교 교사였던 문석준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학교 내의 이습회문고(而習會文庫)에서 사상서적을 탐독하게 된 것이다. 적색독서회 조직 혐의를 받아 치안유지법 위반사건으로 1931년 8월에 동대문경찰서에 검거돼 훈계, 방면되기도 하였는데 이때 그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이재유(1905∼1944)를 만나게 된다. 그와의 운명적 만남은 다소 자료마다 차이가 있다. 일부에선 안병춘이 1933년 3월 용산공작주식회사 영등포 공장의 노동자가 되어 5월에 민족해방 운동가인 이재유를 만난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이재유를 중심으로 서술한 「이재유 연구」(김경일)에 따르면 이재유의 권유를 받아들여 영등포 공장지대를 중심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한 것으로 돼 있다.
“신설동의 빈민촌에 아지트를 두고 지하로 잠복하기 이전인 1933년 3월 중순, 이재유는 안병춘을 만난다. 이재유가 안병춘을 알았던 것은 그의 어머니인 이안전(李安全)이 이재유가 기식하고 있던 김용식의 집에서 방을 빌려 밥을 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병춘은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그 집에 자주 출입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이재유와 접촉할 기회가 많았다. 이재유는 일반사회의 정세에서 시작하여 조선의 운동 정세 등을 기회있을 때마다 설명하고 또 함께 토론하였다. 또한 안병춘은 그의 친구인 배제고등보통학교의 이동천과, 이동천의 친척으로 같은 학교 학생이었던 김칠성, 강양섭 등을 이재유에게 소개하였다. 이재유는 신문 기사 등을 재료로 이들을 교양, 지도하는 한편, 안병춘에게는 변혁적 노동운동을 하려면 단순히 가두분자로서 활동하는 것보다는 공장에 들어가 노동자로 활동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권유하였다. 이에 찬성한 안병춘은 같은 달 하순 용산공작소 영등포 공장 직공으로 취직하였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이들의 운동방식이다. 이들은 이른바 ‘트로이카식’운동을 하기로 합의했다. 안병춘과 이재유에 따르면 일본제국주의 하에서 가장 착취당하는 사람들은 저임금과 고율 소작료에 시달리는 노동자와 농민이라는 인식 하에 이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노동, 농민운동을 펼쳐야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대중과 분리돼선 안된다는 것이었다.
즉 쓸데없는 조직을 남발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노동대중의 불평불만이 있는 곳에서 민족해방과 노동해방사상을 알리고 상당한 그룹이 결성된 때에 비로소 조직을 가져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는 종래와 같이 사람을 지도한다든가 지도를 받는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함과 동시에 지도되는 것을 말하는데 80년대로부터 격렬하게 전개됐던 운동권내의 노선투쟁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렇게 하여 트로이카 방식에 동의한 이재유와 안병춘이 최초의 트로이카 성원이 된 것이다. 이후 변홍대, 이현상, 최소복 등 다섯사람이 상부트로이카를 형성하고 노동운동은 산별로 조직한다는 방침에 따라 안병춘은 영등포를 중심으로 섬유부문을 맡아 노동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어 그를 중심으로 안삼원, 이병기 세사람이 영등포의 노동운동 부분에서 하부 트로이카를 결성한 것이 1933년 8월 중순이었다.
이와 같이 각각의 자유의사를 바탕으로 한 트로이카 방식에 의해 자신들의 부서가 어느 정도 정해지면서 개별운동가들이 가지고 있었던 운동부문은 상호 교환이나 증여를 통해 계통적으로 정리되었다.
안병춘은 당시 각 사업장의 공장 파업을 적극 지도하였다. 경성방적주식회사, 북천전기주식회사, 용산공작주식회사, 영등포 공장 등에 조직을 확대하는 한편, 노동자 수, 임금, 노동자 연령 등 노동실태 전반에 대한 조사 연구도 병행하였다. 11월 용산공작 주식회사를 사직하고 12월부터 서울 중림동 오후석의 집에서 가정교사를 하면서 운동을 계속하였다. 1934년 여름 이재유의 각 조직이 일본경찰에 노출되었을 때, 핵심활동가로 지목돼 경찰에 구속 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
1934년 8월 6일 산업별 노동조합협의회 구성 혐의로 동지14명과 함께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기소돼 1935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복역하였다. 이후에는 몇 차례에 걸쳐 약 6년간을 복역했다.
변혁운동이 미약했던 것을 배경으로 당 혹은 당적 기관이 대중 속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외부의 권위에 의존했던 사정에서 당시 운동가들의 대다수는 관념적이고 또 권위주의적이었다. 수백년 동안 유교적 전통의 영향으로 노동에 대한 일정한 편견이 있었다. 아울러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거리감 또한 점차 극복되고 있었다하더라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안병춘은 당시론 인텔리출신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직접 노동자가 되어 노동대중 속에 파고 들어가고자 했던 대중노선과 현장 중심의 운동을 실천한 노동운동의 1세대임에 틀림없다.
·참고자료
「한국 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 강만길외, 창작과 비평사(1996)/ 「경기도 인물지(상)」 이내창, 경기인물편찬위원회(1991)/ 「이재유 연구」 김경일, 창작과 비평사(1993)/ 기타 일제시대 재판기록
·자료제공: 강진갑(경기문화재단 전문위원)
·증언: 안덕균(고 안병춘의 아들·이천시 도척면 거주)